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 공부가 재미있어졌다. 그 시작은 영어였다.
초등이 아닌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알파벳을 배웠다. 영어는 시험 과목 중 하나였지 흥미로운 언어는 아니었다. 대학 3학년 겨울 방학 때 생존영어만 구사할 수 있는 상태로 호주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영어에 관심이 생겼고 재미가 붙었다. 취미란에 독서를 적었던 난 영어가 재미있어지면서 책과 영어를 함께 할 수 있는 번역에 관심이 갔다. 번역 공부를 해보려고 어느 기관에서 개설한 번역가 양성과정을 수강했다. 그곳에서 나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와 책 애호가를 만났다. 서울토박이였던 그녀는 책, 영화, 공연에 관해 모르는 게 없는 식견의 소유자였다. 어느 날 그녀와 버스에서 마주쳤다. 앞 뒷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책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왔다. 앞에 앉아 몸을 반쯤 돌린 상태로 말을 하던 내게 그녀는 무슨 책을 주로 읽느냐고 물었다. 난 대답했다. “인문학이요.” 그녀는 뒤이어 어느 분야의 책을 좋아하는지, 최근에 읽은 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 순간 버스가 덜컹거렸고 차에 탄 승객들의 몸이 일제히 뒤로 기울어졌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고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다행이었다. 내 대답은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난 내 대답에 이어 어떤 질문이 나올지 예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단편적인 헛소리를 하면서도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를 포장하고 싶은 마음만 앞선 것이다. 그녀에게는 별 것 아닌 에피소드였을 수도 있지만, 이후 그때의 일이 계속 되새김질되었다. 난 왜 난데없이 ‘인문학’이라는 말을 내뱉었을까. 내가 주로 읽고 있는 분야는 소설이었다. 20대 중반의 일이니 이후 강산이 두 번 남짓 바뀌기까지도 내 취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인문 사회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구매해서 꽂아두긴 했으나 손이 가지 않았고, 처음 몇 장을 읽다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읽기 시작해 밤늦게까지 다 읽어버렸다. 책 좀 읽는다는 내게 책의 역할은 9할이 흥미 위주, 오락거리였다.
책 읽기의 힘은 읽는 이를 변모시키는 데 있다고 하는데 난 내 마음을 비춰주는 글귀와 낯선 단어가 모여 만들어내는 말,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감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TV보다 책 보는 걸 더 즐기는 나를 스스로 과대평가했다. 그래서인지 책에 대한 의견을 논리적으로 많은 예를 들어가며 막힘없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서 늘 주눅이 들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소감이라야 재미 여부와 어느 부분이 인상적이다라는 수준에 불과했다. 마음에 고여있는 말은 많은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에 한계가 있었다. 내가 하는 한마디에 곱절이 넘는 의견이 되돌아오면 난 말이 막혀버렸다.
40대 초반 직장을 그만둔 후 이런저런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21년 지역의 어느 문고에서 열린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게 되었다. 능력주의에 관련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강좌였다. 글을 한 편 써서 완성한다는 공지가 있었음에도 신청 당시 난 그 강좌를 그저 책 읽기의 연장선으로만 생각했다. 강좌에서 읽어야 할 책이 혼자서는 읽지 못할 책이라는 데 욕심이 동했다. 일단 수업에 이름을 올리면 ‘잘 해내기’보다는 ‘성실’하게 완주하는 건 자신이 있던 터라 글까지 쓸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해당 강좌가 끝나고 꽤 긴 글도 써냈다. 이후 계속 읽고 써보자는 취지로 모임이 결성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좌의 후속 모임이 결성된다는 소식에 강좌를 맡으셨던 선생님은 꽤 기뻐하셨고, 이후 책 선정에 필요한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터였다. 모임에서는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선정하고 선생님이 골라주시는 책 목록을 차례대로, 천천히 읽고 있다.
지난 9월 해당 모임의 도서로 마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었다. 신화 읽기라는 주제에 의해 추천받은 책이었다. 200쪽 분량이었으며 서문을 제외하고 총 4 챕터로 짜여있었다. 아무 장이나 펼쳐 읽을 류의 책이 아니어서 앞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어려웠다. 읽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었다면, 읽고 싶은 흥미진진한 소설이 옆에 쌓여있었다면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모임의 일정상 이 책을 읽어낼 시간은 넉넉했다. 처음과 서문을 읽어내고 1장, 2장이 넘어가니 3장은 한결 수월해졌고, 4장을 읽고 나니 책의 흐름이 보였다. 1독을 하고 나니 모임까지의 시간이 2주 정도 남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시 읽다 보니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어려웠던 책의 첫머리는 번역자가 책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부분이었다. 종교사에 대해 관련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읽기가 어려운 건 당연했다. 재독하니 책의 구성이 보였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성과 속의 개념에 따라 그동안 내 지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했던 영화의 장면들이 해석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분야의 책과 영화가 접목되어 떠오르고 이건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신기했다. 늘 모호하게 안개에 싸여 있는 듯했던 문화적 코드가 나 나름대로 해석이 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처음 읽을 땐 논문처럼 읽혔던 『성과 속』을 재미로 빠져들며 탐독하게 되는 경험은 좀 놀라웠다. 이런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독서력이 생겼다니 내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20대 중반에 나를 포장하고 싶어 ‘인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나는 지적 호기심보다 지적 허영심이 더 컸을 것이다. 대답할 수 없는 난감한 질문에 부끄러움을 느낀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문에 매진할 정도의 열정이 부족했고,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또한 없었다. 그나마 그때의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내 주변에는 내가 어떤 걸 채워야 하는지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초록색 창도 없었다!^^::) 단, 열정과 용기는 없었지만 뻔뻔함은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기웃거리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마음이 있었기에, 난 이런 읽기를 가능하게 해 준 선생님을 만났고, 모임을 이룰 수 있었다. 아주 기특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