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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늠 Jan 07. 2024

폭설

2023년의 마지막 주말

휴양림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고 숲에 머무는 걸 좋아한다. 휴양림은 산림청에서 국민에게 제공하는 산림복지서비스로 지역 내 주요 명산에 휴양림을 조성하여 누구나 예약을 통해 캠핑 및 숙박을 할 수 있다. 시설 이용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누구나 예약을 통해’ 이용할 수 있지만, 이게 참 쉽지 않다. 시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매주 수요일에 다음 달 평일 예약분을, 주말 예약은 추첨으로 뽑는 경우가 많다. 일정표에 알람 표시를 해두고 예약 창이 열리는 순간 클릭 경쟁을 펼치지만 내가 원하는 휴양림을 원하는 날짜(특히 주말)에 예약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난 11월 22일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산음휴양림의 통나무집예약에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2023년의 마지막 주말 토요일이었다. 나는 예약 성공 후 결제하기 버튼이 활성화된 걸 보고 이게 현실인지 새로 고침 버튼을 눌러보았다. 정말 성공이었다. 더 볼 것도 없이 결제하고, 달력에 일정을 기록했다. 아이들도 둘 다 집에 있는 시기였다. 각자 방에 들어앉아 노트북만 들여다보느라 거실에 둘러앉아 얘기하고 장난칠 시간도 내주지 않는 아들들과 2023년의 마지막 날을 인터넷과 차단된 산속에서 오붓하게 지낼 생각을 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휴양림 일정과 함께 새해 일출을 강원도에서 보자는 걸로 여행계획이 추가되었다. 나만 좋아라할 게 뻔한 휴양림에서 아이들은 좀이 쑤실 게 뻔하니 다음 숙소는 모든 문명을 다 누릴 수 있는 시설로 예약했다.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고 난 이후로 여행이며 나들이를 친구들과 다닌 터라, 실로 오랜만에 떠나는 가족여행이었다. 근처 맛집도 검색하고, 휴양림의 산책로 코스도 미리 확인한 후 여행계획을 알렸다. 아이들은 그저 “네? 네.”로 대답할 뿐 자세한 일정은 묻지 않았다.


2023년의 마지막 주가 끝나고 드디어 토요일 12월 30일이 되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 창밖을 보니 눈이 쌓여 있었다. 난 눈을 무서워한다. 빙판과 빗길에서 발을 접질려 깁스한 경험이 4번이나 있어 미끄러움을 유발할 만한 상황에 부닥치면 몸이 굳어버린다. 눈이 쌓인 도로를 보니 이걸 어쩌나 싶은 낭패감이 먼저 들었다. 운전할 남편은 제설하여 오히려 차 다니는 도로가 안전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휴양림 입실은 3시까지였고, 점찍어둔 맛집에서 점심을 먹으려는 계획에 따라 11시 즈음 우리는 집을 나섰다.


지도상 서쪽 끝에 있는 고양시에서 제1 수도권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에 있는 양평으로 이동했다. 달리는 차의 앞 보닛에 굵은 눈이 계속 쌓였다. 출발한 지 50분이 지날 무렵 휴양림에서 문자가 왔다. ‘산음자연휴양림 취소 요청 안내’라는 제목의 문자였다. “대설로 인해 통행이 어려우니 취소 부탁드립니다. 본인 취소 시 위약금 발생할 수 있으니 취소를 원할 경우 031-774-8133으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트럭이 앞으로 끼어들면서 우리 차로 뿜어낸 더러운 눈발을 받으며 달리고 있던 순간 확인한 내용이었다. 갑자기 차뿐 아니리 우리의 연말 행사까지 오염되는 기분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어 문의하니 폭설로 인해 진입이 어려울 수 있어 원하면 위약금 없이 취소를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난 취소할 생각이 없었다. 막히는 고속도로를 한참 달린 후였고, 검색해 둔 버섯전골도 먹고 싶었다. 휴양림 직원의 조심히 오시라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4차선 국도를 달렸다. 남한강을 옆에 두고 길게 뻗은 도로를 천천히 달리는 건 꽤 운치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약간 고무되어 있었고, 눈 쌓인 야트막한 경사를 오르지 못해 헛돌고 있는 차 한 대로 인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옆 차선을 지나치면서, 남편은 겨울이 오긴 전 겨울용 타이어로 갈아두었다며 자신의 준비성을 슬쩍 상기시켰다. 양평 6번 국도에 진입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까지의 도착 시각이 20분으로 표시되었다. 그즈음부터 차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주행도로는 주황색이었고, 20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차가 움직일 때마다 5분씩 늘어났다. 버섯구이 전골집까지의 도착 예정시간은 계속 늘어만 갔다. 20분이 45분, 50분으로 늘어나는 걸 확인하며 남편은 대상 없는 짜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 2시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배가 고프면 식은땀이 나는 남편 뒷덜미에 땀이 고이는 게 보였다. 겨우 한 바퀴 굴러가고는 한참을 서서 대기하기를 반복했다. 기는 듯한 속도로 꽉 막힌 도로를 겨우 빠져나간 후 100m가량의 오르막을 지나야 하는 길에 이르렀다. 오르막길에는 차량 행렬이 빼곡히 줄지어 있었다. 한 바퀴도 굴러가지 않고 마냥 서 있다 남편은 문득 앞서 본, 얕은 오르막도 오르지 못해 헛돌던 차를 떠올렸다. 저 앞에 그런 차가 한 대 서 있는 게 아닐까라는 말을 하곤 갑자기 차를 왼쪽 길로 꺾어 샛길로 빠졌다. 남편의 운전 스타일은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느니 다른 길로 빠져 달리는 게 좋다는 쪽이었다. 평소 그렇게 차량 행렬에서 빠져나와 너른 논밭 사잇길을 달리다 목적지로 합류하는 경험이 많긴 했다. 오도 가도 못 하는 차량 행렬에서 샛길로 빠지면 앞서 빠져나간 차나 뒤따라오는 차가 있기 마련인데, 그날은 우리뿐이었다.


남편은 제설작업이라고는 되어 있지 않은 논밭 사잇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난 밭고랑과 길도 구분되지 않는 눈으로 뒤덮인 길을 우리 차만 홀로 달리고 있는 그 상황이 서서히 두려워졌다. 시골길과 개울 사이에 놓인 다리도 지나 한참을 달리다 차는 야트막한 오르막에서 멈추었다. y자 갈림길에서 왼쪽 50여 미터 앞에 집과 창고가 보였다. 남편은 계속 앞으로 가는 게 무모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곳에서 유턴하여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겨울 타이어로 바꾸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차바퀴가 헛돌기 시작했다. y자 갈림길에 낀 채 차는 왼쪽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y자 갈림길 안쪽에 보이는 집까지 이어지는 눈밭이 차가 갈 수 있는 길인지 턱이 있어 밑으로 고꾸라질 가능성이 있는 좁은 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왔던 길을 후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했다. 차바퀴는 계속 헛돌았고, 난 애초에 왜 이런 길로 들어온 거냐는 말이 나오지 않게 입을 더 꽉 다물었다. 유턴이 가능해 보이는 공간이 차가 갈 수 있는 길인지 확인해야 했다. 차에서 내리니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y자 갈림길에 턱이 있는지 눈 아래 땅을 밟아보았다. 헛도는 왼쪽 바퀴 주변에는 다행히 턱이 없었다. 남편은 유턴할 공간을 발로 휘저으며 평지인지 가늠한 후 아이들에게 내려서 차를 밀라고 말했다. 시골 눈길을 달리면서 분위기가 싸해진 차 안에서 잠자코 있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벌컥 문을 열고 내렸다. 남편이 발로 대충 밟아 확인한 눈밭 아래 공간은 다행히 모두 평지였다.


고요했던 앞길에 난데없이 나타난 차 한 대가 소란을 일으키자 집주인인 듯한 남자가 멀리서 팔짱을 끼고 우리를 지켜보았다. 나는 우리가 침입자이긴 하지만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고, 개가 달려들지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과 함께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사히 유턴하여 시골길을 벗어나 도로에 들어선 후 내가 말했다.
 “집에 가자. 휴양림 취소하고.”      


모두 말이 없었다. 남편은 말없이 차를 몰았고, 도로변 옆에 음식집 간판을 발견하고는 일단 밥을 먹자며 차를 세웠다. 음식점은 오르막 안쪽에 있었다. 남편은 올라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길가 잡화점 옆에 차를 주차했고 우리는 10m를 걸어 음식점에 도착했다. 세 명의 종업원이 우리를 맞았다. 음식점에는 우리뿐이었다.      


다음 날 뉴스를 보니 2023년 12월 30일 토요일 새벽부터 서울과 수도권에 폭설이 내려 최고 적설량이 12.2cm(서울 기준)에 달했으며, 오후 6시 기준 강원도 영서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우린 폭설의 한가운데를 뚫고 달리다 하필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지방으로 여행을 갔던 셈이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 동해로 떠났을 수많은 여행객처럼 말이다. 그날 우리는 상을 가득 채운 밥상으로 허기를 면한 후, 지극히 안전한 대책을 세웠다. 앞서 도착한 차들이 뒤로 미끄러져 진입이 어렵다는 휴양림 숙박을 취소했고, 다음 숙박지인 춘천 도심지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해넘이도 해돋이도 보지 않았고, 그저 연말과 연시를 아무 탈 없이 함께 맞을 수 있음에 만족하며 2024년 새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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