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분만 휴가를 끝내고 내과 병동에서 정형외과로 로테이션됐을 때의 일이다.
10년 동안 내과 간호 업무에 익숙하던 때라 새로운 일터는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응급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이었다.
병동엔 Emergency car라 해서 응급 시 바로 처치할 수 있는 기구와 약물이 준비된 car가 존재한다.
출근과 동시 기구 작동을 살피고, 약물을 카운트하고 머릿속으로 응급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하고는 인수인계를 받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그날은 나른 한 여름 오후였다. 인수인계를 받고, 병실 라운딩을 하고 있었다. 548호 영호 할아버지와 아들이 떡을 드시며 이야기 중이었다.
" 할아버지. 떡은 혹시라도 목에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 에이. 괜찮아. 이도 아직 다 있고. "
오랜만에 아드님이 찾아와 들뜬 기분이었다.
병실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간호사 스테이션에 도착했을 때였다.
548호에서 호출벨 소리와 함께 다급함이 몰려왔다.
" 큰일 났어요!!!"
뛰어 가보니 548호에 계시는 태호 할아버지가 온몸이 새카맣게 변해가고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입술과 손끝에 이미 청색증이 있었다.
옆에 계시던 영호 할아버지 아들이 금방 사 온 떡이라면서 낮잠을 자고 일어난 태호 할아버지에게 찰떡을 준 것이 화근이었다. 흰 고물이 묻은 떡은 할아버지의 기도를 막았고, 태호 할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후배 간호사가 하임리히법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할아버지의 상태는 회복되지 못했다. 담당의에게 보고 즉시 CPR이 시작됐다. 고령이었고, 몸도 약했던 태호 할아버지의 가슴을 압박하자마 우두둑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소 농도 수치도 떨어지고 있었고, 의식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필 담당의가 없어 내과 의사가 올라왔고 기도 삽관을 하고 흉부 마사지가 계속되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기도 삽관한 것이 도움이 됐는지 기도로 들어갔던 찹쌀떡이 흉부 마사지를 하면서 관을 통해 툭 튀어나왔다.
할아버지는 그제야 청색증이 사라지고 혈색을 되찾았다.
환자의 혈압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할아버지는 3주 동안 중환자실에 계시면서 치료를 받은 후 일반 병실로 나올 수 있었다.
약간의 뇌손상으로 치매가 왔다고 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병원에서 발견됐기에 다시 제2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서 다시 살아난 할아버지는 천만 다행이라 말했다.
그 사건 이후 매일매일 머릿속으로 위기의 순간을 시뮬레이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순간을 위해 응급 카의 약물을 카운트하고, 후두경의 작동을 확인하고 , 기도 삽관 순서를 그려보는 것은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3개월의 육아 휴직이라는 공백이 있었지만 심폐소생술로 한 사람을 드라마틱하게 살려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은 생생히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다.
우리는 살면서 아무도 자신의 죽을 날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평생 살 것처럼 하루를 그냥 그냥 살아간다. 시간을 흘려보낸다.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매일 나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나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나는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항상 마음속엔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며 매일을 살아 간다.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오래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웰다잉에 대해 고민한다.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웰빙을 꿈꾼다.
두 번째 삶을 극적으로 살게 된 할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할아버지에겐 끔찍한 경험이었을지 모르는 그때의 일이 나에게는 간호사로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던 뿌듯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그리고 삶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죽을 수도, 그리고 기적처럼 살아 날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면서 완전한 삶을 꿈꾸고 시뮬레이션 하며 살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