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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한 뇨뇨 Dec 17. 2021

장례식장에서 든 생각


며칠 전 이른 아침에 아버지의 전화가 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평소 별일이 아니면 전화를 하지 않으시기에 무슨 일이 있나 직감했다.

" 건너 집 아줌마 돌아가셨데. 혹시 의료원 영안실에 모셨다 하는데 갈 수 있니?"

내가 가보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건너 집 아줌마는 파킨슨, 치매로 15년 넘게 병을 앓다 돌아가셨다.

처음엔 건망증으로 시작된 병은 말을 못 하고, 기억력이 사라지고, 나중엔 계속 넘어지고 다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할 수 있었다.

병원과 집, 요양병원을 전전했다. 엄마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식의 욕심으로 15년간 두 딸은 작년까지 아줌마를 집에서 간호를 했다. 결국 두 딸들은 50살이 다 되었고, 결혼을 포기했다.



아버지와 길가 아저씨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어쩌면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아저씨는 아줌마가 의식도 없고, 몇 번의 기도 삽관이 반복되면서 임종을 준비하셨다. 작년엔 서울에 있는 부인을 안동 근처의 요양원으로 모시려고 했다. 이송업체를 알아보고, 혹시라도 생길 갑작스러운 일을 대비해서 장례식도 아빠와 상의하셨다. 묏자리를 알아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다는 것을 자주 들었기에 그날의 전화가 놀랍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형님 같은 가족보다 더 의지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기에 동생과 나는 문상을 가기로 했다.  사실 우리가 문상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할 사이도 그런 시기도 아니었다.  코로나로 가족 이외엔 올 수 없으니 쓸쓸한 장례식이라는 것이 눈에 선했다.


남동생과 늦은 저녁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더 조문객이 없어 놀랐다. 안을 둘러보니 열명 정도 넘는 가족과 식당에서 일하시는 두 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코로나로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도 많이 사라졌다. 아빠가 전화한 이유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의 장례식장 방문이라 모든 것이 어색했다.

동생은 붙지 않는 향에 불을 붙이느라 잠시 시간이 지체됐다.

'불 안 붙여도 되니 그냥 향 꼽아.. '

나의 속삭임에 장례식 장의 무거운 공기가 희석되었다.

장례식은 항상 불현듯 다가와 준비되지 않은 이 어색함으로 다가온다.

어리숙함에 부끄러워할까 아저씨가 고마워하면서 우리를 맞아 주셨다. 아저씨는 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나이 19살 고3 때 아버지가 갖고 오신 사진 한 장으로 얼굴 보고 약혼을 하고 결혼해서 지 50년을 함께 살았지. 너희라면 19살에 어른들 말만 듣고 결혼을 하겠니? 무뚝뚝한 사람한테 시집와서 고생만 하다 간 불쌍한 사람.. "



옆에 있던 조문객이 물었다.

" 아저씨는 건강이 어떠세요? 그래도 크게 아픈 데는 없으시죠?"

아저씨는 말이 없으셨다.

" 아줌마, 할머니 때문에 정작 아저씨는 아플 여유도 없으셨죠?"

내 한마디에 눈물이 글썽이고 한숨만 내 쉬셨다.



아저씨도 이제 곧 여든 살이 다 되어 간다. 100살 노모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다. 노인이 노인을 간호하고, 아파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플 수 없는 몸이었다.

15년 넘게 파킨슨을 앓는 아내를 간호하시느라 정작 자신은 아플 여유가 없었다. 좋아졌으면 하는 희망에 연명치료를 하다 15년의 시간을 눈만 뜬 채 지내다 아줌마는 돌아가셨다. 아줌마가 아프면서 아저씨는 열심히 일해서 샀던 논도 병간호로 다 팔아버렸고,  두 딸은 쉰 살이 다되어가고 결혼을 포기했다. 인간의 수명이 느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이제는 비극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노인이 노인을 간호하게 되고 장수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닌 부모님 세대에겐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조문객이 없는 장례식장에서 한 시간 동안 아저씨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드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아저씨에게는 아플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생겼다. 양쪽 어깨의 한 짐을 조금은 덜어 내셨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일흔이 넘은 고모와 환갑이 넘은 부모님도 할머니 앞에서는 아프다고 이야기를 못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가 90살이 넘어 돌아가신 후 어른들은 아픈 곳이 많아졌고, 매년 병원에서 수술이며 입원을 하셨다.

아파도 아플 여유가 없었던 우리 부모님 세대. 어쩌면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파도 부모님이 있으니 말하지 못하고 참기만 하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부모님께 오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평생 부모님 봉양하시느라 자식 키우느라 내 몸 아플 여유는 없었을 부모님께 안부를 물어야겠다.



아줌마에겐 길었던 투병 생활을 뒤로하고 영원한 평온이 깃들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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