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를 향해

진밭일기 2018년5월19일

by 시야

오키나와를 향해

진밭일기 2018년5월19일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 투쟁한지 22년 되는 주민 ooo입니다.” 토미야마씨가 지나가는 주민을 붙잡고 한국참가단에게 인사를 시킨다. 통역사가 22년이라고 말할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통역을 의심했다. 22개월을 22년이라고 오역한 것이 아닐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나와서 오키나와 반기지투쟁 50년 중에 22년을 헤노코신기지건설반대투쟁을 했다는 이야기를 연설속에서 얼핏얼핏 듣게 된다. 도대체 이곳 오키나와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반평생을 투쟁해왔다고 사람들은 증언하는 것일까?

오키나와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건 아주 오래전 아는 지인의 소개였다. 그 때는 순진하게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많다는 것과 따뜻한 남쪽 섬이라 한국의 겨울을 그곳에서 여행하면서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는 막연한 해외여행의 동경이었다. 다. 오키나와라는 이름만으로도 싼 하와이를 연상케했고, 값싸게 해변가의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값싼 상상을 했었나보다. 그렇지만 삶은 내게 그런 여유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느닷없이 찾아온 사드는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사드가 성주 성산포대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언론이 발표했던 2016년 7월 12일 밤, 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 운전해 겨우 성주로 돌아왔다. 사드가 뭔지도 몰랐던 나지만, 사드가 미군부대와 연관있다는 것을 직감했었고, 평소 주한미군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미군문제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하고 활동해 본 적 없었던 나였다. 나는 내가 사는 성주에 미군부대가 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겠다는 좌절감 때문에 몸을 떨어야 했다. 떠날까말까를 쉼없이 고민했지만,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나로선 내 활동을 다 그만두고 사드반대투쟁 속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어느 날 사드기지가 있는 일본을 찾아간다는 사진가의 말에 솔깃해서 무작정 따라나섰다. 교토부 고탄고시의 아주 작고 먼 시골마을인 교가미사키라는 곳에 사드엑스밴드레이더기지가 있었다. 교토에서 4시간 차를 달려갔다. 한여름의 찌는 더위에 바닷가 특유의 짜증스런 습한 날씨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교가미사키로 달려가는 일본시골은, 아니 일본의 자연은 위대했다. 울창한 숲과 잘 정돈된 논과 밭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웅장한 일본의 자연을 만나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교가미사키에서 사드기지 반대활동해왔던 000마을이장님은 내게 무릎을 꿇고 “일본이 한국에 몹쓸짓을 한 것에 대해 일본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한국인들을 보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고 했다. 일본군대에 끌려갔던 한국의 위안부여성들에게 매우 깊은 반성과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씀했는데 진심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깊은 곳에 뿌리깊게 심겨져있던 일본, 일본사람에 대한 증오와 편견이 사르르 사라져버렸다.

나의 첫 해외경험은 사드 때문에 가능했다. 해외여행에 대한 동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이 마흔이 넘도록 한번도 외국에 나간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언어문제였지만, 내 관심을 끌만한 무엇이 없기도 했다. 사드는 내게 외국을 나가야 할 이유를 안겨주었다. 교가미사키에 자리잡은 사드 미군기지와 일본자위대, 현지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마을과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오키나와의 사정을 듣게 된다. 매년 세계평화대회를 오키나와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접한다. 세계의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키나와 미군기지문제로 평화행진을 한다는 말에, 나는 꼭 오키나와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세계의 평화활동가들이 모이는 곳에서 전 세계가 전쟁없는 지구를 만들기 위해서 같은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월이 오기만 기다렸다. 오키나와 평화행진 한국참가단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잴 것도 없이 신청을 했다. 생각보다 비행기삯이 비쌌다. 경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나는 내질렀다.

혼자서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는 나는 나하공항까지 홀로 찾아갔다. 오키나와 평화행진의 한국참가자들은 오후2시에 나하공항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비행기로 먼저 도착한 나는 낯선 이국땅의 언어속에서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간혹 모국어가 섞여 들리기도 했지만, 남의 나라에서 들리는 모국어조차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게끔 나는 주눅들어있었다. 환전을 부탁한 철순씨는 늦게 온다고 했다. 다행히 박형선교무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3천엔이 있어서 점심은 공항에서 사먹을 수 있었다. 만약 박형선교무님의 엔화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굶으면서 물도 한모금 못 마실 뻔 했다.

때가 되어 일행을 만났고, 오키나와 현지에서 미군기지 반대투쟁을 하는 토미야마 상과 통역을 담당해줄 카토상, 구와나상, 미나씨 세 사람을 만났다. 평화행진 기간 동안 한국참가단을 태워다닐 미니버스도 준비되어있었다.

한국참가단은 평택의 미군기지감시활동을 하는 단체, 녹색연합, 열린군대, 군산시민 한분, 제주강정과 소성리에서 나, 모두 열두명이 참석했다.

우리는 결단식이 열리는 장소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결단식은 ‘복귀46년, 제 42회 오키나와 투쟁과 삶을 위한 평화행진’을 성사시키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자리인 듯 했다. 외국인인 우리는 통역사가 나눠주는 수신기를 귀에 꽂고 행사진행되는 동안 통역사의 통역으로 겨우 말귀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시끄럽기만 하고 잡음으로 절반은 못 듣거나, 집중을 못해서 제대로 다 알아들은 건 아니다.

올해 평화행진 참가들 중에는 젊은 층이 많다고 한다. 단상에 오른 대표자격인 어른들은 매우 고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주로 남성들이 많았다. 참가자들 대다수가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했다.

행사를 마치고 우리가 묵을 숙소를 찾았다. 상상밖에 아주 멋지고 좋은 전원주택이었다. 팬션을 통째로 빌렸나보다. 2층 집인데, 야자수같이 크고 울창한 나무로 둘러 쌓인데다 바로 눈앞에 바다가 있어 전망이 아주 좋은 집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사박오일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를 위해 일본사람들이 고기바베큐 파뤼를 준비해주셨다. 넓적한 쇠고기를 큼직하게 바베큐로 구워서 양껏 먹었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많다보니 쇠고기가 흔하게 잘 먹는 육류인가보다. 역시 외국에 나온 것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음식문화였다. 우리 식생활과는 완전 다른 문화, 된장과 김치였다. 현지의 미소된장과 편의점에서 산 김치를 아주 조금 준비하셨는데, 내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고기는 실컷 먹었지만, 고기에 곁들일 소스는 2%부족했다고 할까? 일본사람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와 분명 다른 문화에 내가 적응이 쉽지 않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 며칠동안을 잘 참는수밖에.

아침과 저녁은 팬션에서 직접 요리해서 식사를 했고, 점심은 밴또를 먹었다. 일본밴또는 주로 튀김이었는데, 밥은 양껏 들어가 있었다. 일본쌀이 맛있다고 한다. 밴또에 구성된 밥과 함께 먹을 반찬은 늘 어울리지 않는 메뉴였다. 주로 튀김종류여서 목이 매인다. 그렇지만 밴또를 못 먹은것도 아니다. 잘 먹으면서도 왠지 밥과 조화가 맞지 않는 반찬종류에 놀라울 뿐이다.

헤노코기지 앞에 펼쳐진 농성장 앞, 지난번 일본분들이 소성리연대오셨을 때 영상으로 만났던 곳, 영상보다 훨씬 고풍스런 분위기였다. 우리와는 좀 다른 농성건물과 구조, 나무로 기둥을 세워만든 농성장 건물은 헌 마굿간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층층계단으로 만든 앉을자리며, 지붕의 이음새며, 수수하면서도 섬세한 손놀림이 느껴진다. 최대한 볕을 막아 그늘을 만들기 위해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만든 지붕은 꽤나 넓게 햇볕을 가리고,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1400일 넘게 유지된 농성장이고, 반대편 너머에 해상시위를 한 곳은 4000일을 넘겨온 농성장이 있다고 한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이 발표되고 싸움을 하기 시작한 것은 22년이 되었다고 한다. 공사가 22년동안 지속된 것은 아니겠지만, 꽤나 긴 시간동안 이 곳 주민들의 끈질긴 투쟁이 공사를 제시간에 맞춰 완성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아왔던 것이라 보여진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 주변의 주민들뿐 아니라 오키나와 현의 시군들이 돌아가면서 버스를 대절해서 이곳으로 연대투쟁을 오는가보다. 장기싸움을 해온 사람들답게 조금은 여유도 느껴지고, 그렇다고 해서 치열함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평화행진은 시작되었고, 제일 선두에 선 방송차에서 구호를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채 따라다녀야했다. 따라하지는 못해도 열심히 응원했다. 그리고 걸었다.

우리 뒤로는 똘망똘망 아이들이 따른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이다. 수원의 자유학교 6학년 학생들이 이곳 오키나와까지 평화수업을 하러 온 모양이다. 열두명의 어린이와 두명의 학교교사가 참가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오키나와에 관심을 가지고 참석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어왔다. 나는 그동안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일본의 우익들을 만났다. 그들은 검은 지프차에 방송장치를 설치해 우리가 걷는 길목에 느닷없이 나타나더니, 목소리에 짜증과 환멸이 묻어나 있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목소리의 톤이나 분위기로 엄청나게 기분나쁜 말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평화행진 대열로 차를 몰고 돌진하는 바람에 경찰이 여러 번 제지를 하였다. 그들은 경찰도 두렵지 않은 듯 했고, 경찰이 과잉행동을 제지는 했으나, 별로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않는 모양새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바 없어보였다.

경찰은 수가 많지 않아보였다. 아마도 한국은 의경을 자원한다고는 하지만, 군복무의무제에 해당하는 만큼 경찰병력 수가 채워지지만, 일본은 모병제로 운영하다보니 의경은 없고 직업경찰들로 구성되어 있나보다. 한국의 경찰 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로 움직이는 듯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건 일본경찰들의 체격은 하나같이 작고 삐쩍 말라보였다.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을 받으면서도 긴팔정복을 입은 경찰들은 안쓰러울 정도로 몸이 왜소해보였다. 왜일까?

일본사람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오키나와 현지인도 있지만, 일본 본토에서 오신 분들이 많다. 오키나와 민중연대라는 이름으로 한국과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다고 하는데, 오키나와와 한국 뿐 아니라 일본의 본토의 평화활동가들도 포함된다.

제일동포도 있고, 일본의 부락해방운동을 해왔다는 일본사람도 있다. 오키나와 출신인데 본토에서 자란 사람도 있다. 통역사들은 직업이기도 했지만, 평화운동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교류회는 꽤나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교토의 엑스밴드레이더미군기지건설을 반대하는 단체가 있었는데, 교가미사키 사드기지반대활동을 해왔던 분들이다.

일본사람들이 교류회를 오랫동안 열심히 잘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번 한국을 방문하여 연대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성주촛불때부터 소성리 사드 알박기까지 수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의 소식을 평소에 유튜브를 통해서 계속 보아왔던 거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컸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근 50여년 동안 활동했고, 그 중에 20여년을 넘게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반대했다고 할 정도로 반평생이 아닌 한평생을 반미 - 반기지 운동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젊은 세대로 교체되지 않는 한계도 분명 노출되어있지만, 두 다리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기지없는 오키나와를 꿈꾸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투쟁할 수 밖에 없다는 그들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교류회에서 나는 소성리상황을 연설하기로 되어있었다. 일본으로 오기 전에 연설문을 미리 작성하고 제출했었는데, 나의 연설을 통역해주실 분은 카토상이었다. 그녀는 일본연대자들과 함께 여러번 성주에 방문했었고, 소성리 사드반대투쟁에 대해서 관심있게 지켜보면서 중요한 내용은 번역해서 선전물에 옮기는 일을 해왔다고 한다. 그녀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연설하는 중에 통역하는 그녀가 오히려 나보다 더 감정이 이입되어 울먹이는 것이었다. 나도 울컥하는 마음을 참는 중에 통역하는 옆사람이 울먹하는 소리에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녀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해주는 일본인에게 연대의 깊은 정을 느낀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언어소통이었다. 통역사를 세명이나 동행했기도 했지만,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았다. 제일동포인 분은 선대가 한국인일뿐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 원래 한국어를 잘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한국어를 배워서 오키나와민중연대를 이십년동안 해오면서 한국인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아주 큰 과업으로 여기는 분이다. 다카하시상은 실무를 책임지는 분인 듯 한데, 류큐신문 기자와 내가 인터뮤를 할 때 통역을 맡아주실 정도로 한국어를 잘 알아듣고, 한국의 사정을 잘 꿰뚫어보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고, 실제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노력했다. 도미야마상은 아주 능숙하진 않지만, 한국어를 조금은 섞어서 말했다.

그런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감동이었지만, 민중연대를 진심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소성리를 찾아온 일본연대자들이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 보면서 나도 잘하지는 못하지만 알아듣는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반성하고, 일본어회화를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토닥거려보지만, 결국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맨입으로 찾아온거다. 그들의 노력에 비하면 참 보잘 것 없는 내 모습에 부끄럽다.

후텐마기지, 카데나기지, 캠프한샘을 둘러보고, 미군기지로 인해서 일어나는 각종 사회문제들, 내가 충격받은 건 무엇보다 미군기지가 차지한 면적이었다. 카데나는 도시의 80%를 기지가 차지했고, 겨우 17%의 면적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인구도 점점 줄어들고 있을테니,

오키나와가 제주보다 1.5배 안되게 조금 큰 섬이라고 하는데, 미군기지는 스무개가 넘어섰다고 한다. 미군기지가 오키나와를 잠식해가고 있다. 오키나와는 휴양의 섬이 아니 전쟁연습하는 기지섬이었다.

평화행진을 하면서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귀동냥을 하게 되었다. 학자는 없지만, 이 곳의 현지인으로 투쟁하고 있는 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마음껏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었다. 오키나와로 휴가온 김교수님이 내게 메도루마 슌작가를 소개시켜주었다. 산문을 엮은 ‘오키나와의 눈물’을 꼭 읽어보기를 권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나는 책을 주문했다. 오키나와 문학을 메도루마 슌에 의해서 접할 수 있을거 같다.

그러면서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는, 그럴려면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있어야한다는,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현지인들의 삶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는.

영상으로 봤던 90세 할머니를 직접 만났다. 말을 주고 받을 수 없었지만, 아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할머니는 곱게 화장을 하고 차려입고 나오셨다. 목소리도 또렷또렷했다. 허리는 꼿꼿했다. 전쟁을 겪고 평생을 미군기지가 건설되는 땅에서 반대투쟁을 해왔다는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고운 분이셨다. 할머니의 생애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내게 오지 않겠지만, 저 분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듣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내가 멋질까? 일본어를 꼭 배워야겠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일본어를 시작할 것이고, 나는 겨울에 다시 오키나와를 올 계획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자신은 없다. 겨울에는 평화행진이라는 짜여진 일정에 참여하기보다 자유롭게 헤노코 신기지 건설반대 투쟁현장에서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좀더 많이 가질 수 있을거다. 그리고 그동안의 투쟁하며 영위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무엇보다 소성리 사드반대하면서 힘겨워하는 우리 주민들과 함께 올 수 있다면 배울게 많을 거 같았다.

오키나와의 민중연대가 왜 필요한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밑으로부터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장이 바로 오키나와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제국에 저항하고 민중들의 뜨거운 연대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곳이 오키나와라는 것을.

평화행진에서 만난 가수, 이름은 잘 모르겠다. 이름을 여러번 들었지만,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 발음, 마이유미? 아이유미? 아.. 아주 정열적인 가수였다. 행진대오 속에서 멜로디온을 연주하면서 같이 걸었다. ‘오키나와여 일어서라’ 노래는 부르면서 행진의 분위기를 띄웠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를 한국어로 일절 부르고, 일본어로 이절을 불렀다. 일본에서 세월호 노래를 듣게 되다니, 영광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구 중의 하나가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라는데, 정말 포기하지 않을 거 같은 오키나와의 저력을 느낀다.

매일 일과를 마치고 나면 우리가 묵는 숙소로 간다. 아침과 저녁은 팬션에서 직접 요리를 한다.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나는 매번 요리에 끼여보지 못했다. 실무자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팬션에서도 식사를 챙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나같은 게으른 참가자들은 주는 밥을 받아먹기 여념이 없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차려놓은 밥상에 밥은 척척 잘 받아먹었다. 저녁을 먹고나면 빠짐없이 술과 노래로 민중연대가 이뤄진다. 정말 신기한건, 한낮의 더위속에서 장거리를 걷고 움직였던 사람들이 팬션으로 돌아와서는 쉬지 않고 먹고, 떠들고, 노래한다. 그리고 돈독한 사이로 발전한다. 첫날부터 끝까지 한국인 참가단과 함께한 토미야마상이 있었다.

4박5일의 길지 않은 여행다운 오키나와 평화행진의 시간이 끝났다. 내가 받은 충격과 감동을 글로 다 적어낼 자신은 없다. 다만, 오키나와를 사랑하게 된 건 분명하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전투지로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이라는 끔찍한 학살의 기억이, 미군정 치하에서 일본으로 복속하였지만 오히려 일본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키나와를 희생시킨다.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그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분명 훌륭한 일본인들도 많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진심으로 오키나와의 민중연대를 실천해왔다. 미군기지 문제를 약자에게 떠넘기는 비열한 짓은 하지 말고 미국의 패권질서를 뒤집어 진정한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 민중연대를 해내야 한다고 이야기 해왔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일거다. 미국의 군사전략의 중요한 요충지인 오키나와와 한반도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아프고 슬프다. 그들의 역사와 우리역사가 제국주의에 수탈당하면서 폭력으로 진압당하면서 인권이 유린되어온 역사를 가진 약소민족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다시 오키나와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는 간단한 일본어를 알아 들을 수 있을만큼은 회화를 할거다. 메도루마 슌의 오키나와 문학책을 반드시 읽어서 역사와 문화에 관한 지식을 조금은 알고 나갈거다.

내가 느낀 충격과 감동을 다른이들이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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