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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Jul 25. 2018

내 보석함

내 보석함에 보석이 쌓이고 있다.      


이 한 장의 사진, 

평화마라토너 강명구님은 중국의 넓은 대륙을 달리고 있다. 원불교 원익선교무님과 김선명교무님 두 분이 강명구님을 응원하기 위해 중국의 장예로 길을 떠났다. 세 사람이 만나서 사진을 찍어 올렸다. 사진 속에 소성리가 제작한 뚜벅이 티셔츠를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먼 이국땅에서 “그래도 뚜벅뚜벅” 달리고 있는 평화마라토너와 평화의 종교인들의 만남에 내 가슴이 벅차고 충만해진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님은 2015년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횡단 5200km 단축마라톤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2017년 9월부터 ‘유라시아 대륙횡단 평화마라톤’을 올 10월까지 16개국 1만6000km를 달려 한반도를 가로질러 들어올 예정이다. 북한의 판문점을 넘어 남한으로 온다고 했다. 

그가 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관심 있게 쳐다보지 못했다. 한 나라를 건너올 때마다 그의 소식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순의 젊지 않은 나이에도 장거리 마라톤을 견뎌낼 체력이 될까? 가장 걱정이었지만, 대륙을 달려오는 그가 왜 마라톤을 하게 되었는지 가장 궁금했었다. 

지금은 강명구님이 곧 한반도를 가로질러 들어올 때쯤 67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서 북한의 판문점을 통과하여 들어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어느덧 사드가 우리 곁을 찾아온 지 2년이 훌쩍 넘어섰다. 2016년 7월15일 금요일 오전10시경 황교안총리와 한민구국방부장관이 성주로 내려왔던 날이 아직도 내 뇌리에 생생히 기억난다. 성주군청을 가득 메웠던 군민들, 성주여고와 성주고 학생들, 성주군 주민대표들과 간담회를 하겠다던 정부각료는 군청현관으로 불쑥 나와서 고개를 숙이면서도 사드배치를 철회할 수 없다고 했고 성난 군중들의 저항은 시작되었다. 

하루종일 총리와 장관의 차량을 막고 사드배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저항은 거셌지만,  그들은 도망칠 작전을 짰다.  문도 없는 군청 뒷마당 담벼락을 타고 성주여고 앞 도로에 대기 중인 경찰의 승용차를 타고 도망갔다. 

나는 군청 앞마당에서 가장 뒤의 가장자리에 있었지만 정부각료가 버스를 타러 군청 뒤 마당으로 갔을 때 가장 앞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 그들이 도망칠 때 우리는 뒤쫓아 가기 위해서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경호하는 남자들에게 가로막혀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 때 내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면서 한 남자의 앞섶을 쥐고 비켜달라고 했었던 것이 경찰들의 채증카메라에 제대로 찍혔다. 그 일은 공무집행방해로 기소되었고 2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7월 20일 첫 재판이 시작되었다.  K2군공항 이전반대 때도 함께 집회시위법률을 위반하였다고 기소했다.

2여년 동안 파란만장한 일들에 비하면 그다지 큰 고민거리는 아니다. 내가 생면부지의 경찰 멱살을 잡았다고 하지만, 소성리를 야만과 폭력으로 짓누르면서 들어온 성주사드기지는 내 온몸에 피멍으로 남았다. 

평범한 성주주민들은 일상의 평화가 깨졌다. 삶은 뒤죽박죽 되어버렸다. 국가가 정한 법, 힘있는 자들이 불법이라고 법으로 단죄하겠다고 큰소리치니 힘없는 성주주민은 사드도, 법처벌도 어찌 막을 방법이 없다. 다만 후회되는 건 그 굵고 단단한 팔뚝을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뚫고 들어가 사드를 성주에 배치하고는 도망치는 정부각료 두 놈의 뒷다리를 힘껏 쥐어서 “사드철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야 했는데 2년 전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후회로 가슴이 먹먹하다.     


그러나 2년은 내게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이기도 하지만, 고비를 넘길 때마다  환희로 가득했다. 


성주로 사드가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내 가슴 밑바닥에는 절망의 늪이 되었다.  

정부각료들이 도망가고 상황이 종료될 시점에 전화한통이 걸려왔다. 구미에서 해고되어 투쟁하고 있는 헌호씨였다. 전화기 너머로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 그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껄껄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는 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그 당시 통곡을 하던 중에 전화를 받았고, 울먹거리는 소리가 상대편에게 새어 들어갈까봐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 날밤 헌호씨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과 함께 성주군청으로 들어와서 촛불문화제를 참여했다. 그 이후로 자주 성주를 다녀가곤 했는데,  노동자들의 투쟁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선 그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답답하고 우울한 나의 이야기를 그에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서 작은 수의 조합원들과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신념도 강하고 실천적인 사람이라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그 시절에 내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성주주민이었지만 성주를 잘 몰랐던 나로선 2년 동안 성주를 알게 되고, 성주주민이 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주촛불로 진한감동도 컸지만 아픔으로 얼룩진 끝을 봐야했다.     

결국 사드는 성주하늘을 맴돌다가 성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성주하늘 아래 소성리로 정착한다. 또 한번 울분과 원통한 시간들이 흘러갔지만, 소성리는 내게 아주 각별한 곳이 되었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님이 한반도로 성큼 성큼 다가오는 발자국소리를 느낀다. 깡마른 몸에서 어떤 에너지가 있어서 이렇게 힘겹고 긴 여정을 이겨내고 달려오는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를 어느새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꼭 한반도로 질주해 들어오시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사진 속의 원불교 원익선교무님과 김선명교무님은 박근혜대통령이 파면 되는 날부터 시작한 진밭의 평화기도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종교인이지만 종교적인 색채보다는 철학이 있고, 인간적이면서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교무님들의 모습을 늘 지켜보면서 배운다. 

원익선교무님의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글을 쓰고 싶어서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었지만 가난이 교무의 길로 인도했다는 이야기. 교무로서 학자로 살아가지만 글을 쓸거라는 희망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글을  읽는 것을 즐긴다. 

임실에서 성주 소성리까지 매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때로는 홀로 달려와서 진밭의 새벽을 시키는 광철교무님, 따뜻한 형선교무님과 귀여운 성혜교무님

사드반대 투쟁하며서 어린나이에도 묵묵히 소성리와 진밭을 돌봐주신 현욱교무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원불교의 훌륭한 현자들은 내게 스승님이다. 

좋은 스승을 만난 내 2년은 안타깝지 않다.      


무엇보다 소성리에서 만난 부녀회장님과 할매들은 최고의 선물이다. 

‘날마다 좋은날(日日是好日)’을 몸소 보여주신 우리 할매들의 해학이 우리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유조차가 들어오고, 사드가 들어오고, 공사장비가 들어오고, 보수꼴통 양아치같은 족속들이 들어오고, 속이 문들어지고 썩어나갈 거 같은 암흑 같은 시간 속에서도 할매들은 평생동안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를 총동원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금연엄니가 공사인부들에게 한 호소는 절대 진리였다. 

“공사인부 너거가 자꾸 오면 평화가 안온다. 너거가 안 와야지 평화가 온단다. 이제 돈 그만벌어먹고 오지마라”     

어른들. 

소성리가 속한 행정구역인 초전면 소재지에 살면서 소성리와 가까운 이웃마을의 남성어른들이 끝까지 소성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지켜주었다. 큰 역할을 해주었다.  

‘아싸리’ 하면서 정의로운 이종희위원장님이나 재치가 넘치는 송대근위원장님과 묵직한 김윤성부위원장님 같은 분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 고마움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내 눈에 참된 어른의 상이었다.     

따뜻한 사람들

소성리에 모인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어 통틀어 따뜻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섬들의 연대, 소성리라는 섬도 함께 한다. 

이 달  전기요금이 2만원 나왔다.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았다. 에어컨이 없다. 

뜨겁게 산 여름을 내게 보상하기 위해서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국제 평화활동가들이 제주로 모인다. ‘섬들의 연대’ 캠프가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원래는 제주생명평화대행진을 참가하려는 목적이었다. 비행기 티켓값을 싸게 끊으려다가 날짜를 당겼다. 여행은 덤이다.  

민박을 구하려고 현지에 사는 분께 문의를 했더니 캠프가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군사주의에 의한 소멸에 저항하고, 평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비전과 실천을 함께 창조한다.’ 는 목적으로 오키나와를 비롯해서 작은 섬에서 평화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한다. 

작년 이시가키 섬에서 섬들의 연대 캠프가 있었다. 가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무식한 나는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올해는 우연찮은 기회를 갖게 되어 부푼 가슴을 안고 내일 제주로 향한다. 그리고 무식한 만큼 나는 용감해지기로 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결과가 무엇이 되었던,

나는 이 순간에도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토론하고 함께 행동하며 지향하는 바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길에 환희가 가득할 것이라는 것을 지난 2년 동안 체험했다. 

그들과 인연이 오래 지속되든 아니든 그것이 지금 내게 중요한건 아니다. 

우리의 인연은 또 필요하면 이어지고 때론 단절되기도 한다. 

다만, 우리가 나아갈 길에 함께 서 있으면 되는거다. 

존경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내 인생에 귀한 보물이 많아지는 것일지니, 내 보석함에 가득한 보석을 갖고 있는 나는 부자다.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 같다. 

열흘간의 낯선곳으로 여행, 내일이 기다려진다. 

「열매의 글쓰기 2017년 7월25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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