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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Nov 16. 2018

평범한 우리의 삶에 한 단면

평범한 우리의 삶에 한 단면들    

사드가 터지고 난 이후로 거의 대부분 사람들과 연락을 두절하고 지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연락도 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연락이 오지도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은 간혹 연락하기도 하고, 만나기를 원했지만, 왜 그랬는지 내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었다. 근 2년이 넘게 소원했었네. 

사람이 그립지도 않았다. 최근에 지인의 좋은 소식이 들려서 갓만에 얼굴 맞대는 자리를 가졌고, 서울서 별님과 접선을 해서 호텔에서 화려한 수면을 취한 정도 ㅋㅋ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멘트인가요?

그러고 보니 누가 보고싶거나 만나고 싶거나 그리움이 내 가슴속에 전혀 없었던 거 같다. 싸늘하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운전면허를 땄다고 연락이 왔다. 차도 장만을 했다는거다. 직장에서 필요하니까 용기를 내서 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제 남편 차 얻어타지 않고 올 수 있겠구나, 운전해서 성주오라고 약속을 했다. 갓만에 둘이서 옛날이야기하면서 수다나 실컷 떨어보자고 했더니만, 

오늘 온다는 친구는 남편과 함께 오겠다고 연락이왔다. 

아이고 맙소사!

친구의 남편이 오랜만에 만나고 싶어한다는 거다. 

나는 너 만나는 것도 정말 오랫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거지만, 남편까지 동행해서 오는 건 별로 반갑지 않다고 난리를 쳤다. 남편까지 와야 할 거 같으면 다음에 보자고, 집도 엉망이고, 내가 사람을 만나고 할 정신도 없다고, 오지말라는 말을 이말 저말 마구 섞어가면서 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남편이 다 듣고는 오랜만에 보자고 하는데, 차마 더 오지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우,, 지 차도 샀다면서 남편을 껌딱지처럼 붙여 다니는 건 무슨 경우인지 원. 어쩔 수 없이 손님을 초대하였으니 집을 치우고 난리북새통이었다. 

와우.. 정말,,, 

순박한 노동자 부부이고, 운동권은 아니지만, 운동권들과는 좀 가깝게 지내는 소시민인 그/녀가 집으로 찾아왔다. 오랫만에 본다고 양손에는 선물보따리를 가득들고 몇년만에 얼굴을 봤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내 여자친구들의 근황을 듣다보니 다들 참 사는게 기가 막힌다. 사는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지만, 다들 사연들은 거의 뉴스에 나올만한 사건과 비등할 정도의 내용이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남편의 폭력이 아들의 폭력으로 옮겨지는 이야기며, 신혼초에 남편의 도박과 주사에 못 견디고 아이들을 두고 집나갔던 여자가 큰 딸을 키우고 있던 중에 작은 딸아이가 아빠랑 살면서 자살한 이야기며, 사는 근황들이 왜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가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평범하다는 게 어떤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친다. 

우리가 말하는 평범하다는 것은 실존하고 있는건지, 관념속에 그려진 그림같은 건 아닌지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고 약육강식적이고, 사는게, 살아지는 게 아닌 치열한 경쟁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데, 평범하다고 믿는 일상은 누군가 우리 머릿속에 주사기를 투입해서 만들어놓은 허상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자살율 1위 국가라고 하는 걸 봐선 내 한때 친구였던 이의 둘째 아이가 자살하는게 그다지 이상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매일 같이 뉴스로 쏟아지는 비정규직 해고와 사용자 갑질 논란 같은 걸 봐서는 내 친구의 남편이 하루가 멀다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아서 백수로 지내다가 다른 회사로 이직해서 다니다가 또 일을 그만두기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않은가?

처음엔 아내를 성폭력으로 제압해서 결혼하고, 가정내에서 폭력은 일상화 되고 , 아들을 폭행하면서 폭력은 폭력으로 진화해 가는 게 이 사회에서 뭐 그리 이상하기만 할까?    

친구의 아버지가 아파트에서 투신해서 자살하셨다. 평생을 노가다로 잔뼈가 굵은 분이었다. 일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밥도 드시지 않을 만큼 일밖에 모르는 분이었고, 쉬는 날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집안을 돌보던 분이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했고, 으스러진 갈비뼈를 감싸안고 일했던 어른이 노인이 되어서 의지할 연금도 없이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아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치매가 온거다. 

병원에서 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자식에게 마지막까지 빚이 되고 싶지 않았을게다. 

정신이 돌아오자 바로 퇴원한 어른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식들이 모두 집으로 달려왔었나보다. 아버지가 괜찮은 걸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간 사이에 결국 고층 아파트 자신의 집에서 투신해 하늘로 훨훨 날아가버리셨다.     

오키나와에서 부고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조문은 하지 못하고 친구를 만나러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뒤로 잠시 불러내 친구를 만났다. 자살이라는 소식에 충격이 컸고, 아버지의 자살을 차마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친구가 슬픔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당혹스러웠을 거다. 

친구를 붙들고 자살한 거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버지가 자신의 생을 정리할 권리가 있다. 오히려 생을 마감할 시기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이 사회가 더 문제인거지, 아픈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웠을 아버지 생각하면 오히려 아버님을 위해서 잘 보내드렸으면 좋겠다. 부끄러워 하지마라. 아버님은 자식들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을거다. 

자식을 위해서 자살을 선택하게 만드는 사회가 더 큰 문제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아버님의 투신은 가슴아프지만 너무나 공감되고 아버님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테지만, 반듯하게 살고 싶었을 거다.     

나는 내가 사는 방식이 별로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내 친구 또는 이웃의 사는 방식은 매우 평범할 거라고 근거없는 확신을 가져왔었다. 

오늘 평범하다는 것의 정의가 뭔지 의심이 들었다. 

한국사회가 세계의 자살률 1위라는 통계가 맞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듯이 내 이웃은 자살하고 있고, 비정규직 1000만명을 넘어선 시대를 살아가는 것을 증명해내듯이 내 지인들은 한 곳에서 오랫동안 정년을 보장받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 공장에서 15년을 넘게 일한 친구의 남편은 최저임금을 받는다. 물론 상여금이나 제수당이 있는 정규직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이 이들에게 기본임금이고 임금인상의 요인이다. 그래서 임금인상은 매년 1월1일에서야 된다. 올해는 상여금 100% 삭감도 노조가 시원하게 내 주었다고 한다. 

노인이 될수록 존중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할 운명에 처해진 사회를 우리는 살아간다. 

그래서 어쩌란 거냐?

오랫만에 친구와 옛 친구들의 근황을 듣다보니 뉴스의 사건 사고는 알고보면 내 주변에 천지삐까리로 늘리고 늘린 이야기였다는 것을. 

내가 너무 사회와 단절하고 안전한 곳에서 숨어살았나 싶은 생각이 번쩍 

 그래서 어째야 할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는 거다.

「열매의 글쓰기 2018년11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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