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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Aug 08. 2020

카메라를 든 사연

작년 메이데이 전에 싸우는 여자들을 기록하는 작업팀을 꾸렸다.  이름도 똑소리 나는 또록 이라고, 또 기록하고 또 기록 하자고 했던가? 또라이처럼 기록하자고 했던가? 어느것이든 그냥 흔하디 흔하지 않은 그저그렇고 그런 이야기 아닌, 뭐 그런 걸 고민하면서 나는 싸우는 여자들을 기록하는 쓰는 여자가 되었고, 우리는 또 토론하고 또 기록하면서 즐거운 만남을 유지했는데, 

소성리에서 나는 싸우는 여자였다. 적들의 침탈에 분노하고 악을 쓰고 발버둥을 치면서 내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상황실의 인력이 부족해서 페이스북라이브를 찍으라고 했을 때도 나는 기록자의 눈이 아니라 싸우는 사람의 분노로 내 손에 카메라방송을 하거니 말거나 내 성질을 못 이겨서 경찰을 향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욕을 해대고, 정작 상대편이 하는 말을 남겨야 하는데, 나의 우렁찬 목소리에 상대의 목소리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결정적인 증거가 될만한 영상하나 건지지 못했고, 우리가 사드기지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진탕 터지고 있구나 하는 건 알렸을지 몰라도, 정말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잘 싸우고 있는지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후회로 밀려올 때가 많았다.  

지난번 7월 2일 사드기지로 쓰레기차와 분뇨차가 들어올때, 진밭2초소에 놓여있는 바리케이트안에 여성들이 우르르 들어가서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하면서 나는 덩치가 커서 들어가기 어려울 거 같았는데, 막상 몸을 숙이고 다리를 먼저 넣고 몸을 쑥 밀어넣으니까 나도 들어가 앉을 수 있게 되었고, 내 옆으로 다섯인가? 여섯명의 여성이 하나의 바리케이트 안에 콩나물시루보다 더 복잡게 빽빽하게 앉아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소성리로 사드가 배치된다는 결정이 난 날부터 소성리 마을 입구에서 진밭교 앞에서 수시로 유조차를 막고, 군대 이동차량을 막고, 사드장비 반입을 막는 전투를 치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앞장서고 적들과 대치하면서 싸워왔었다. 가장 앞은 소성리부녀회장님을 비롯해서 할머니들이지만, 젊은 새댁이들도 만만치 않게 깡이 쎄고, 깡이 없는 사람도 소성리서 사드반대하다보면 깡이 쎄질 거 같기도 하고,  악을 쓰면서 버티고 전투를 치뤄왔다.  

바리케이트 안으로 들어간건 그간의 싸움으로 훈련된 결정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소성리 사드반대파 여성들이 너무 잘 싸운거다. 

이 여자들 왜 이렇게 잘 싸우는 거야?

잘 싸우는 여자가 사랑스럽다. 

나는 이렇게 잘 싸우는 여자들이 궁금해졌고, 질문이 생겼고, 뭔가 남기고 싶었다. 

나는 쓰는 여자 보단 기록하는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기록을 할 수 있을지는 갈팡질팡 생각이 꼬리의 꼬리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소성리는 글도 글이지만,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겼는데, 이렇게 잘 싸우는 여자들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상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어서 누군가,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도와주길 바랐지만, 입에서 우리를 찍어주세요 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지금도 찍고 있는 영상을 잘 나오게 하는 방법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서없이 무작정 영상활동하는 분께 도움을 청했다. 

무모한 시도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데, 그는 내게 반응해주었고, 도움을 주었다. 내가 영상을 촬영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대여신청해주었고, 내가 카메라를 쓸 수 있도록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카메라 사용법만 듣고는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 어슬렁 소성리 야간시위 하는 난로가로 올라갔고,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본 소성리할머니들은 내가 이제 감독이 되려나보다면서 웃으면서 농담을 나눴고, 어른들은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의자에서 튀어나가 버리면서 슬슬 피해버렸다. 

영화 소성리의 여자주인공의 가방모찌를 하면 베를린으로 갈 줄 알았는데, 아직 아무 소식이 없으니,  나는 내 힘으로 베를린을 가겠다면서 한 10년 찍으면 다큐 한편 나오지 않겠냐고 위풍당당하게 포부를 밝히자, 옆에서 듣고 있던 백광순 할머니는 10년 후면 우리 죽고 난 다음이라 우리는 우리가 나오는 영화도 한 프로 못 보겠네 하고는 난로가에서 박장대소하게 만들어버렸다. 

 소성리난로가는 카메라를 들고 뻣뻣하게 굳은 내 손과 팔 그리고 다리의 긴장을 풀어주는 스트레칭 준비운동을 하는 곳이 되어주었고, 사람들이 핀잔을 주거나 말거나 찍자고 마음을 먹고,  나는 이제부터 뻔뻔해지자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무엇부터 찍어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카메라를 받은 다음날이 바로 소성리부녀회장님이 고령경찰서로 출석하는 날이었고, 나는 아침부터 카메라를 들고 소성리부녀회장님 집으로 향했다. 고령경찰서로 가는 차안에서 서툰 솜씨지만, 카메라의 마이크는 소성리부녀회장님의 입을 향했고, 부녀회장님은 차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고령경찰서로 조사받으러 들어가는 지능범죄수사과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까지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으니까, 경찰이 어디서 나왔냐고 묻자 

우리측 변호사 왈

"소성리tv"에서 다큐를 찍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해주었다. 

대박이다. 

와우.. 정말 10년 찍어서 다큐멘타리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그리고 정말 베를린영화제를 간다는 목표를 가지고 찍어보자는 자신감이 ㅎㅎㅎ 멋진 시작이다. 

뭐 이렇게 삶도 투쟁도 계속 되는거라고 생각하니 내 인생은 정말 멋진 드라마같다는 생각이

앞으로 또 얼마나 재미난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열매의 글쓰기 2020년8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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