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경험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빵 터졌다. 특별한 상상을 한 것도 아닌데 웃음이 났다. 예전에 대공장 정규직시절을 지냈던 이들 빼고나면 거의가 다 노동조합이 첫경험이다. 첫경험 그 자체로 설렌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을 시작한지 일년하고도 칠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적지않은 일들을 겪으면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우리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우리의 슬픔과 기쁨을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후회없는 싸움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생계비가 절실했다. 걱정없이 투쟁하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매번 끊임없는 생계비마련을 위한 재정사업을 해야 하는건 보는 것만으로도 힘겹고 지친다. 책을 팔아서 생계비를 만들고 싶다는 절망스런 문자에 가슴이 무너졌다. 책을 만들어서 팔면 정말 생계비를 만들 수 있을까? 자신없지만 시도를 해볼만 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해봤다. 아니 돈버는 책 말고 우리의 진솔된 이야기를 적은 책 만들자고 다시 마음을 다독이면서 시작했다. 아사히비정규지회 조합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서 좋은 책 말이다.
책을 만들자고 하고는 조합원들이 글을 과연 쓸수 있을까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누군가가 다 써줘야 하는 거 아닐까 걱정도 앞섰다. 그러나 시도 해보지 않고는 알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22명의 조합원 중 17명이 직접 글을 쓰기로 했다. 이상했다. 글을 써보겠다는 용기가 대단했지만 생전 글 한번 써본 적 없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건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인터뷰하는건 더 힘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쓰기로 해놓고 빵구내면 어떻게 하지? ' 걱정은 기우였나보다. 모두가 원고마감일을 딱 맞춰서 글을 썼다. 잘 썼던 못 썼던 날짜에 맞춰 숙제를 한 모범생들이었던 거다. 칭찬을 한 바가지 해도 아깝지 않을정도 훌륭한 학생들이었다.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은 기쁨이고 앞으로 가능성이 열렸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초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너무나 어슬픈 문장과 줄거리에, 눈길을 확 끄는 재미난 소재도 조금은 부족한 듯 하고 밋밋한 느낌의 줄글들이다. 이를 어째야 할까? 숙제를 한번은 내지만 두번 세번 내는건 쉬운일이 아니다. 처음 글을 쓴 조합원들도 쓰고 나니까 하고싶은 이야기가 자꾸 생기더란다. 더 쓰고 싶은 내용이 생기더란다. 내가 쓴 글이 내가 봐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더란다. 고치기로 했다. 직접 수정해보기로 했다. 분량과 상관없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더 많이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글을 손질해보자고 했다. 일주일씩 여유를 더 가지고 글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조합원들의 글은 달라졌다. 이전의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내용이 풍부해져서 돌아왔다. 글을 쓰다지우다 앞에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써보면서 생각했던 흔적이 묻어났다. 전체 21명이 22개의 글을 모두 냈다. 조합원 에세이 글이 완성되어간다.
첫경험이다. 책을 만드는 첫경험을 함께 하고 있다. 나도 책을 만든 적은 없으니 지금 별별책은 내게 짜릿한 경험이 될거다. 글을 쓰는 묘한 매력이 있다. 아사히비정규지회 조합원들과 관계를 맺고 연대를 하면서 만난지 일년이 넘었지만 그들을 알지 못한다. 이제 겨우 이름을 외우고, 말을 좀 건네보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지만 늘 낯설다. 그가 쓴 글에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 순간에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판단을 해왔는지, 그런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금까지 버텨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글이 말해주는 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전한다. 말은 공중으로 흩어져버리지만 그가 쓴 글에는 자신의 감정을 풍부히 표현하지 못해서 쩔쩔매면서 볼펜을 종이에서 떼지 못하고 있다. 볼펜을 손에 거머쥔 그의 고뇌가 살짝 엿보인다.
등불 하나 보태주고 싶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희미한 등불이 바람에 흔들려도 얇은 한지 한장에 의지해서 불을 밝혀 세상에 희미하나마 작은 빛 되려고한다. 그 옆에 희미하지만 작은 빛 하나 보태는 심정으로 참고 견뎌온다. 그리고 먼훗날에 후회없이 싸웠노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가 함께 한 첫경험도 먼 훗날에 그때 그시절에 우리가 함께 웃고 울었던 이야기로 쓰여져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