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리 피정의집에서 수다방
기웅씨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하면서 텔레비전을켠다. 뉴스가 나온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인 줄 알고 지냈다.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을 읽고 세상이야기를 들었다. 진실인 줄 알았던 이야기들은 노동조합을 하면서 불편해졌다. 세상은 아무 문제없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왜곡된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살았던거다. 노동조합은 세상이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가진 자들의 편에서 군림하는 세상의 불의와 부당함에 저항하자고 이야기 한다. 세상을 움직여가는 힘이 누군인지 그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가자고 한다.
예전엔 노동조합이 없었던 회사에 다녔던 농성장주방장은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말았다. 회사는 나의 것이 아니라 늘 사장의 것이었고, 나는 일하는 사람일 뿐이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려면 내가 그만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만두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사히글라스에서 그는 그만두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가입했을 때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그냥 내 발로 떠나서는 안 될거 같았다. 노동조합에 희망을 걸고 싸워보고 싶었다. 노동조합 시작하자 해고당했다. 사실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재계약시점만 되면 가슴 졸이며 그 기간을 넘겨야 했다. 재계약을 해도 원청관리자의 눈 밖에 나거나, 하청관리자에게 밉보이면 그만두고 떠나야 했다. 해고당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노조가 필요했던 이유다.
칠곡군 연화리 ‘피정의집’에 모인 아사히비정규지회 노동자들이 마음치유를 위한 수다방을 열었다. 수다를 마음껏 떨어보자고 자리를 마련했다. 노동조합에 관한 생각을 나누는 수다방에는 수일씨, 영민씨, 종섭씨, 상원씨, 남달씨, 세정씨, 기웅씨, 영주씨, 그리고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싶지 않은 농성장주방장가 있었다. 멀리 서울서 온 순영씨와 대구에서 온 은지씨가 함께 수다방에 배석했다.
나는 그들의 수다를 기록한다.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하는 아사히비정규지회 노동자들이 장기화되는 투쟁에도 용기를 잃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본다.
노동조합은 첫 경험의 짜릿함으로 온 몸에 전율이 흐르지만 좌절과 희망을 넘나드는 고뇌를 안겨준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한꺼번에 다 안겨준 심오한 감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새롭다. 공장에서 문자한통으로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노동자에겐 절망을 딛고 일어나야 할 용기가 필요했다.
예전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하나하나를 의논하고 의논할 때마다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 안에서 뿐 아니라 끊임없이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야기 해달라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자신의 주장이 생겨났다. 그리고 행동한다.
구미 ‘오리온전기’라는 대공장의 정규직으로 근무해 본 경험 있는 종섭씨는 당시에도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고 한다. 그때 정규직노조의 조합원이었던 종섭씨는 떠나가는 버스의 꽁지에 붙어서 가는 대로 따라만 다니면 되었다고 한다. 나설 일도 없었고, 나서지도 않았다. 그냥 노조가 하자는 대로 따라만 다니면 되었다. 그러나 아사히비정규지회는 달랐다. 떠나가는 버스가 아니라 시작하는 자가용이었다. 누군가 대신 운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해가야 하는 노동조합이었다.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훨씬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노동조합이라는 점에서 예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한때는 이발사로, 작은 영업소를 직접 운영해본 적 있는 남달씨는 공장에서 일할 때는 아무 생각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속은 편했다고 한다. 자영업 사장님이라고 하지만 영세한 규모의 가게에 직원을 두게 되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챙겨야 해서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장님 마음도 이해가 되는데, 비정규직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단다.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야 할 게 많아도 사장이니까 책임져야 하는 것이 있는건데 비정규직은 그야말고 일회용품 취급을 당하게 되니까 그건 아니다라고 생각되어 노동조합이라는 배에 합류하기로 결심을 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세계로 항해하는 배였다.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어려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많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정부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스스로 더 영리해졌다고 자부하게 된다.
노동조합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자본가를 상대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조직인 노동조합에는 소통이 중요하다. 누군가 불만이 있으면 그 불만을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해소하기 위해서 대화하고 해결방법을 찾고 합의를 모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은 한점으로 모아내는 것이다. 이해가 될 때까지 소통해 낸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서로간의 신뢰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해 내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조직이고, 조직은 단결할 때 힘을 발휘한다. 단결은 말처럼 쉽지 않다. 군대식으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이뤄낼 수가 없다. 이해될 때까지 대화하고 설득하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신뢰를 쌓는다. 신뢰는 내부를 단단하게 만드는 에너지이다. 외부적으론 단결이란 커다란 힘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노동조합활동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려운 게 단결하는 것이다.
다행히 아사히비정규지회는 서로간의 이해심이 높은 듯 하다. 조금 부족하고 못마땅한 것이 있어도 참고 이해하면서 협조적이다. 어딜 가도 참여율이 높다. 비록 22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노동조합이지만 남에게 미루거나 빼지 않고 최대한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조직력으로 드러난다. 자기의 재능을 발휘해내는 것은 더 큰 에너지로 나타난다. 개인개인은 조금은 자신의 역할에 소홀한 점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역할에 대해서 책임있게 잘 하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 조직력으로 돋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조직력은 더 커지지 못한다. 아사히글라스 공장 밖에서 싸우고 있는 한 조합원 가입이 늘지 않는다. 공장안으로 들어가더라도 당장 노조가 인정되어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조가입은 쉽지 않을거다. 그래서 쪽수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구미공단에 아사히비정규지회의 선전활동과 투쟁으로 노동조합이 하나 둘 늘어난다면 쪽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거라 생각되어서 중요한 투쟁전술은 미조직사업이다.
내 공장 앞에서 선전전은 하지 않지만, 구미공단의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 앞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노동조합 만들어서 임금인상과 인간다운 삶을 살자”고 선전전을 꾸준히 해왔다. 실제로 효과를 보기도 했다. ‘한국옵티칼’은 아사히비정규지회가 매일같이 선전전했던 사업장이다. 그 곳에서 첫 노조의 물꼬가 터졌다. 미조직사업을 강조하던 금속노조는 공단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아사히비정규지회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시늉만 했다. 투쟁과 연대해왔던 아사히비정규지회가 상급단체에 관한 평은 한마디로 “금속노조는 말뿐이고 민주노총은 힘이 없다”로 정리한다.
“나는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지회에서 어떤 사람이고 싶냐?”는 질문을 던졌다. 수일씨는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고 한다. 세정씨는 “등불이 하나 있으면 내가 등불 하나 더 보태주는 사람이고 싶다”고 한다. 모두가 그런 마음이다. 꼭 필요한 사람이고 싶다는 한결같은 바람을 이야기한다.
투쟁이 장기화되는 것은 두려움이다. 가족과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기도 하지만 갈등과 불화로 어려움을 더욱 증폭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긴 싸움을 잘 이겨내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울하고 힘겨움으로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즐거움과 환희의 시간은 좀 더 긴 시간을 버텨내는 에너지로 샘솟는다. 우리는 계속 투쟁을 더 즐겁게 할 방법을 모색하고 아이디어를 나누면서 방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한다.
구미공단의 아사히글라스 공장 천막농성장과 서울의 정부청사 앞 투쟁사업장들이 모여서 함께 하는 농성장을 오며가며 지루하지 않은 투쟁을 이어간다. 서울농성장은 9개가 넘는 투쟁사업장이 함께 한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무리지어 다니다보니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서울에선 밥연대가 온다. 구미농성장에는 주방장이 직접 해주는 밥을 먹는다. 구미에선 차를 타고 다니지만 서울에선 걸어다녀야 한다. 서울 광화문은 100만촛불의 위력이 넘쳐 아침 일찍 정부청사 앞에서 선전전하는 우리 대오에게 도로로 지나가던 차가 멈춰선다. 혹시나 길을 물을까봐 걱정하고 있는데, 차주인은 창문을 열더니 “엄지 척”을 하고 지나간다.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대하는 격려와 지지의 손짓에 외롭지 않다.
후회하지 않고 싶다. 먼 훗날 지금의 투쟁을 기억할 때 후회 없이 투쟁했노라고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그렇게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