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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VS도깨비

별별책 제목정하기

by 시야

연하리 ‘피정의 집’ 밤이 깊어갈 때 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뒷풀이는 조촐했다. 구미에서 맛볼 수 있는 양념족발을 안주삼아 술 한잔 나누는 자리였다. 음주가무는 제한되었다. 넉넉한 자리는 못 되었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펴고 뒷풀이를 즐겼다. 잘 사람들이 하나 둘 숙소로 자리를 옮겨가고 남은 사람들은 뭔가 이야기거리를 이어갈려고 노력했다. 책을 함께 만든다는 것이 실감이 날까? 자신들이 쓴 에세이를 다 돌려읽었다. 읽은 소감이 어떨지 다 나누지 못했지만 읽고 난 후에 사람들은 조금 흥분되어 있는 듯 했다. 동지들이 쓴 글들을 읽으면서 가슴이 찡한 뭔가가 지나간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책의 제목을 뭘로 하면 좋을지를 이야기 해보자고 했다. 제목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을테니 아이디어를 내는 수준으로라도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세상을 바꾸는 22명의 도깨비유령’ 세상에 존재하지만 얼굴 없는 존재, 소외되고 불평등한 존재로서 비정규직을 뜻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도깨비라는 이미지가 주는 유쾌하고 경쾌한 느낌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루동안 수다떨면서 나왔던 이야기를 되새김질 한다. ‘첫경험, 알고보니 꾼이네’ ‘세명빼곤 첫경험’ ‘안경 쓴 유령들’ ‘개성있는 22가지 이야기’ ‘싹을 품은 22인의 삶’ 22라는 숫자가 강조되는 것은 마지막 정예인원으로 남은 22명인 자신을 가리키는 뜻이었다.

‘팔색조의 이야기들, 카멜레온, 하루살이의 반항, 꿈틀꿈틀, 비행, 홀씨, 골병, 나비효과, 채찍효과’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장통’은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시기에 겪어야 하는 통증을 일컬 듯이 지금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의 행복한 성장통’이다.

‘나는 세상의 등불같은 존재이고 싶다’ ‘등불이 되자’‘반항’ ‘허공’ ‘멈춰버린 일상’ ‘붕괴된 일상’ ‘일상의 붕괴’ ‘거꾸러 가는 시계’ ‘보조배터리’‘이중생활’ ‘22명의 환자’ ‘굼뱅이’

‘비정규직 우리는 들꽃보다 아름답다.’ ‘선인장’ ‘어을 뚫고 희망을 찾아서’ ‘뚝딱뚝딱 도깨비’

지난 날에 노동조합은 마지막 꽁무니에 붙어서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는데, 지금의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내가 직접 운전해야 하는 노조같다는 종섭이형님의 볼멘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직접 운전해야 하는 노동조합 ‘뛰뛰빵빵’으로 책제목을 붙여야겠다는 의견이다.

새벽4시까지 옹기종기 드러누워 생각하면서 툭툭 던진 제목후보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무엇으로 정할지는 좁혀지지 않은 채 수만가지의 단어를 흐트러놓았다.

원고는 대충 마감되었다. 한편정도 미뤄져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끝은 날거다. 이제 남은 것은 책제목을 정해야한다. 책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을 정하는 일은 신중의 신중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과 나눴던 의견들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지만 자꾸 의미를 살려내면서 토론해 나갔다.

편집팀에서도 ‘할말있어요 /말하고 싶어요 / 우리는 이제 바꾸고 싶다/ 나도 이제 할 말이 생겼다/ 겨울 이기고 봄’ 등의 생각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던지고, 질러댔다.

아무리 많은 의견이 나와 널브러져도 마지막 결정은 출판사가 하자고 했다. 물론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라서 큰 문제가 있어보이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규직 우리는 들꽃보다 아름답다’를 주장했다. 예전에 아사히비정규지회 관련한 글제목으로 제안한 적 있었던 것이다. 언론사에 기고된 글의 제목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주머니속에 고히 간직해 둔 제목이다. 써먹고 싶다. 물론 내가 쓴 글이 아니라서 주장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써먹지 못한 제목은 아깝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비록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꽃이지만, 마구 꺽어서 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존재임을 주장하고 싶었다.

편집팀의 의견은 도깨비를 선호하는 쪽과 들꽃을 선호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공장으로 가는 길’에 한 표가 주어졌다.

출판사 편집장은 나열된 제목을 봤을 때 22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살리고 싶어하는 경향성과 도깨비 VS 들꽃 으로 간격을 좁혔다. 그리고 22명의 안경 낀 도깨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깨비할래? 들꽃할래?

대답은 어려웠나보다. 쉽게 답을 구하지 못했다.

편집장이 ‘들꽃, 공단에 피다.’를 내놓았다. 그들이 들꽃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지는 자신 없지만, 척박한 공단아스팔트를 뚫고 핀 꽃, 그 꽃은 공단에만 피는 꽃이 아니다. 지금은 공단에 피어있는 들꽃이다.

편집장은 책을 내는 것도 투쟁의 일환이고, 기록이나 전파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크지만, 투쟁에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도 크다고 설명했다. 책제목은 바로 그런 캐릭터, 이 투쟁이 가지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밀양송전탑반대 투쟁에 나섰던 할매, 성주의 평화나비와 같이 투쟁의 승패를 넘어서 그 투쟁이 사람들 마음에 새겨지고 확산되는 것, 역사성을 갖는 데에도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것이 편집장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들꽃VS도깨비는 더욱 치열해질 수 밖에 없었나보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랄지를 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책제목을 정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늘어져있던 것들을 추슬러서 몇 가지 의견으로 좁혔다.

1. 22 도깨비

2. 들꽃, 공단에 피다

3. 공장으로 가는 길

4. 기타 (위 셋 중에 마음에 드는 거없음)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의 김혜진동지가 새로운 안을 제안했다.

‘깔딱고개’다. ‘ 노동해방으로 가는 깔딱고개,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하자는 거다. 산을 오르때 정상을 앞두고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기 직전까지 가파른 길을 맞게 된다. 이곳을 넘어서지 못하면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깔딱고개를 딛고 정상에 오르기까지 숨고르기와 인내를 통해 자신의 몸을 조절하면서 한발, 한발, 가파른 고개를 올라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산정상에 다다라 있을거니까 말이다.

지금은 비록 쫓겨나있는 우리 아사히비정규직 동지들이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가며 한달, 한달을 투쟁으로 채워가는 과정이 깔딱깔딱 고통이 목전에 차 있지만 결국 이 깔딱고개를 넘어 그 고지에 닿을거라는 희망을 가져보자는 거다. 고통이 목전에 차있지만 마지막 넘어야 할 고비, 깔딱고개‘

좋은 의미를 가졌다. 되새겨볼 만하지만 제목으로 쓰기엔 숨가쁘다. 깔딱고개, 고통이 목전에 차있는 이 느낌이 힘겹다.

별별책의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다. 여러 설문조사를 통해서 어떤 것을 더 많이 선호하는지는 잘 확인되었다. 그러나 신중에 또 신중해야 한다. 편집장의 말처럼 어떻게 기억될지를 역사에 남을 캐릭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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