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 2017년9월/169호>
평화야 고치글라! 평화가 길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평화다.
- 2017년 제주강정 생명평화대행진 다녀와서-
철폐연대회원, 지지모임 손소희
성주에서 사드배치에 저항하며 촛불을 밝힌지 일년이 되었다.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원회(이하 성주투쟁위)는 이후 투쟁방향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성주의 소성리마을로 사드 2기가 배치되었지만, 정권이 교체되고 요동치는 정세를 어떻게 보고 해석해야 할지 의견도 분분했다. 소성리 현장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지만, 싸움을 소성리로 협소하게 만들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성주투쟁위는 미군기지건설로 피해 받는 주민들과 연대하고 한국사회 내에 미국의 한반도 군사기지화를 반대하는 여론을 들끓게 만들 만한 기똥찬 계획을 세워보자고 ‘으싸으싸’ 하기도 했다.
연대의 첫 걸음을 제주 해군기지 건설반대로 싸워왔던 강정으로 가기로 했다. 마침 ‘생명평화대행진’준비팀에서 몸짓패 공연을 요청해왔다.
성주에는 사드반대 투쟁이 시작되자 지역주민들이 모여서 ‘평화를 사랑하는 예술단’(이하 평사단)이 만들어졌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시작했던 몸짓패가 결성되었다. 평사단이 2017년 생명평화대행진 전야제 행사에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다.
7월30일 새벽, 평사단과 함께 제주로 출발했다.
2007년 시작한 해군기지 건설반대싸움은 11년을 맞이한다. 강정생명평화대행진으로 널리 알려진 대행진은 6년째 진행하고 있다. 2012년 제주해군기지건설반대 투쟁이 격렬해질 때,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강정의 구럼비 바위를 발파하기 시작할 때, 제주강정의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는 전국민들의 참여를 높여내기 위해서 시작했다.
육지사람들을 제주로 많이 참여시키기 위한 대행진은 제주의 동쪽과 서쪽으로 나눠서 대규모의 행진단이 일주일가량을 걷고 또 걷는다.
‘해군기지 철수’와 ‘구상권 청구 철회’를 외치며 걷는다. ‘평화야 고치글라’ 우리가 가는길이 평화라는 신념으로 걷고 또 걷는다.
올해부터는 강정에서 ‘제주생명평화대행진’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첫 해이다. 강정에 위치한 해군기지건설반대라는 상징성이 희석될까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의 신공항 건설 등의 현안문제가 또다시 불거졌다. 제주의 군사기지화가 가속화되는 것을 막아내고,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고심한 결정이었다고 전한다.
대행진 전야제 행사를 참여하기 위해 강정마을 의례회관에 도착했다. 성주에서 사드반대투쟁하고 있다며 제주사람들은 반갑게 성주사람들을 맞아주었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발언을 할려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생기발랄하고 재치 넘치는 사람들의 영롱한 눈빛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1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녀 들이 겪었을 아픔이 내 몸으로 전이되는 듯 했다. 아픔도 슬픔도 그/녀들이 흘렸을 눈물을 자양분 삼아 기쁨의 에너지로 승화시켰을 투쟁의 역사가 느껴졌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그 시각에 문재인정권은 사드 4기를 추가로 임시배치하겠다고 발표했었다.
사드반대투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성주사람들의 고통의 크기를 무엇으로 잴 수 있을까? 그러나 11년을 싸워온 제주 강정 투쟁의 길이로 비교해 볼 때 십분의 일만큼 왔다. 앞으로 밟아야 할 가시밭길에 마음이 시렸는지도 모른다.
평사단은 ‘들어라 양키야’를 장엄하게 공연하였다. 내가 본 중에 최고의 무대였다. 제주사람들의 찬사도 아주 큰 울림이었다. 한반도의 군사기지화를 반대하는 제주와 성주, 그리고 연대자들의 목소리는 뜨거워졌다.
대행진을 시작하는 첫 날,
이미 완공된 해군기지 정문 앞에 수백 명의 행진단이 모였다. 2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파이프에 매달린 노란깃발이 바람에 일렁인다. 동진팀과 서진팀으로 나뉘어 시작한 행진에는 흥겨운 11년의 역사를 자랑할 만한 노래들이 가득하다. 나와 평사단은 서진팀에 합류했다. 전체 걷는 인원이 360명이라고 하지만 간헐적 참여자들까지 집계하면 1000명의 규모로 대단한 인원이 제주를 양 갈래로 행진한다.
시작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흠뻑 젖신 신발과 옷가지들, 운동화가 무용지물일거 같았다. 오후에 성주로 떠나는 평사단 친구들에게 짐이 될 거 같은 운동화를 보내버렸다. 오후가 되니 햇볕이 쨍쨍이기 시작했다. 또 걷다보면 비가 쏟아져 말린 옷가지를 적셔야했다. 오락가락 하는 비구름을 피하지 못해 평생 맞았을 비를 제주에서 다 맞은 듯했다.
가다쉬다,
가는 곳마다 쉼을 허락해 주는 마을회관, 마을주민들의 따뜻한 간식준비, 배가 고플 새가 없었다. 여성농민회와 농민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를 일이다. 농사일로 걷기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수박화채며, 미숫가루며, 빵과 우유며 종류별로 간식준비를 해주신 분들이었다. 제주의 종교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두 힘을 모아 함께 하고 있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진단을 이끌었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식사준비지원팀은 양쪽으로 갈라져 행진하는 사람들의 하루 세끼 식사를 챙기는데 분주하다. 아침은 빵과 과일과 음료를 준비했지만, 점심과 저녁은 모두 밥을 배식했다. 하나같이 사람의 노동력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양의 식기류는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나면 빈 그릇을 설거지 할 일도 만만치 않아보였다. 그 많은 식기를 모두 모아서 강정으로 이동해간다.
하루행진을 마무리 하고 숙박했던 곳은 주로 체육관이었다. 제주가 관광도시라서 그런지 구간마다 큼직한 체육관시설이 갖춰져 있는 듯 했다. 다행히 잠자리로 마련된 대강당에는 에어컨이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면 오전엔 시원하게 걸을 수 있었지만, 오후의 땡볕에 살이 타들어간다. 잠자리마저 열대야로 더우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거 같았다. 잠자리에서 만난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샤워시설도 갖춰져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다행스러웠다. 사람들은 고생한다고들 하지만, 이정도면 썩 괜찮은 듯 했다.
비를 맞으면서 걸어야 했던지라 아무생각 없이 운동화를 보내버렸다. 샌들을 신고 걷다보니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걸을 때는 통증을 느낄 새가 없었다. 쉬었다 걷기시작하면 물집이 터진 부위가 쓰리고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다. 행정지원팀에서 응급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인상 좋은 아저씨가 쉬는 곳마다 나타나신다. 한 쪽 자리에 의료함을 열고, 불편하거나 아픈 사람들의 진료를 봐주시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발바닥을 그 아저씨께 내밀고 있다. 모두가 장거리, 장시간을 걷기 시작하자 발바닥에 물집과 발목의 무리가 오기 시작하나보다. 나는 부끄럽게 발가락을 내밀었다. 발가락 한 개 치료하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꼼꼼하게 연고를 바르고 밴드로 감싸주신다.
그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의 조합원이다. 제주시청의 환경미화원 차량운전사로 일한다. 응급처치사 자격증이 있어, 해군기지건설반대를 위한 생명평화대행진이 시작할 때부터 결합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에 연대해왔던 만큼 자연스럽게 연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대행진 시기가 여름휴가다. 자신의 휴가는 이곳 대행진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 결합한 이후로 매년 이맘때면 대행진에 응급처지하러 봉사하고 있어요. 매년 할 때마다 오던 사람들이 와요. 일 년에 한번 얼굴보러 나오는거지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도 보이고, 육지사람들에게 정이 붙어서 만나러 와요.
노무현 정권 출범하자마자 제주로 내려와서 43항쟁에 대해 사과도 하고, 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자나요. 평화의 섬이라고 해놓고는, 평화의 섬이 될라면 전쟁없는 평화의 섬이 되야 하는데, 민군복합 항이라지만, 어찌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하냔 말이야, 이게 앞뒤가 안맞는거지“
발가락응급처치를 하고 걸어서 그나마 더 심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 했다. 발가락은 밴드로 덕지덕지 부쳐져있었다.
낯선 이들과 함께 뙤약볕 아래 제주의 도로를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돌담도, 귤나무도, 에머랄드 빛 바다도, 감상할 여유를 느낄 새 없이 노래에 흥겨워 걸었다. 노란깃발을 들고 걸을 때도 있었지만, 힘들면 은근슬쩍 내려놓기도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곁에서 말벗이 되어준 사람들이 생겨났다.
행진지원팀의 안전요원들은 누구보다 사고의 위험에 각별히 신경쓴다. 행진단이 지나갈때까지 차량을 세워 기다릴 때는 운전자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에 눈길이 간다.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지역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 우리의 행동으로 불편을 느끼는 것에 대해 진심어린 예의를 갖춘 모습이었다.
행진단의 구성원들은 다양했다.
볍씨학교 양승찬학생은 작년에 제주로 내려와서 대행진에 참여했다. 볍씨학교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 앞에서 발언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새겨듣다보니 강정이라는 마을이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해서 희생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군기지가 들어서 마을에는 아무 이익이 없다. 주민들은 핍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행진단의 맨 앞 선두를 걷는 볍씨학교 학생들은 모두의 비타민이다. 언제어디서든 생기발랄하게 뛰고 웃는 소리에 행진은 활력이 넘친다.
“광명에서 학교다닐 때는 이렇게 칭찬 듣고 즐거운 일이 잘 없었는데요. 제주 강정 행사에 볍씨학교 학생들이 춤추고 노래하면 정말 박수를 많이 받아요. 여기 실무자분들도 친하게 지내고, 연대오신 분들도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까, 절로 힘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이곳에 오는게 즐거워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볍씨학생들은 이곳 제주생명평화대행진에서 칭찬을 먹고 성장한다.
대행진의 마지막 행렬은 쌍용차지부의 노동자들이 뒤쳐진 사람들을 돌보며 따라온다. 처음 시작할때부터 빠짐없이 참여했던 쌍용차지부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행진팀의 교통질서를 담당하고 있다. 탈진하거나 응급환자가 발생할 수도 있고, 뒤처진 사람들을 잘 살펴야 하는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 쌍용차도 2009년 정리해고로 큰 싸움을 겪고 난 후에 지금은 순차적인 복직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투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한다. 이곳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반대 투쟁은 쌍용차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매우 끈끈한 연대가 이뤄지고 있었다. 윤충렬씨는 매년 휴가를 이곳에서 보낸다.
“2009년 우리는 쌍용차에서 해고를 당했을 때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죠. 노사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하지 않고, 특공대를 들여서 폭력진압했어요. 해외자본의 먹튀로 자국의 노동자들이 고통받는데, 국가는 자국의 노동자를 때려잡았자나요. 그 시기에 제주 강정에서 해군기지 반대싸움을 했었어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가 점점 철수할 계획을 세우는데, 미군기지를 한국으로 옮겨오는 시도로 보여졌지요. 한국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국민을 탄압해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을 위한 군사시설을 한반도로 옮겨오는 것에 반대하는 싸움을 하는 제주와 연대하면서 우리가 닮은 꼴이라고 생각들어요. 매년 이곳에서 참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투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제주생명평화대행진에는 외국인 연대자들의 참여가 높다.
강정 국제팀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Nan Kim씨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재미교포이다.
“2012년 구럼비바위 발파하기 전에 강정에서 국제활동하는 활동가로부터 부탁을 받았어요.. 미군기지 건설반대운동 성명서를 번역해서 해외에 알려달라는 것이었지요. 그게 기회가 되었어요. 강정의 국제팀에 결합해서 자원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한국에 무척이나 오고 싶었는데 2013년에 가족들과 한국에 올 기회가 생겨서 그해 여름에 첫 번 째 평화캠프에 참가했어요. <섬들의 연대>라는 프로젝트로 일본의 오키나와, 제주의 강정을 연결하고 다른 나라의 평화활동가들이 강정으로 모일 수 있도록 한 캠프였지요. 평화캠프에서 다른나라 평화활동가들을 만나서 배우고, 놀고, 미군기지건설반대운동을 했어요. 그 다음 해는 일본의 오키나와 그리고 대만 등으로 각 국을 돌아가면서 평화캠프를 개최하고 있어요. 올해는 평화의 바다 일본 이시가키 섬에서 열려요. 제주 강정에는 다른나라에 없는 국제팀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볼 만 해요. 두 달에 한번씩 영문신문을 만들어 한국 말고도 세계에 강정의 소식을 알리고 있어요. 미국의 군사주의에 맞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려면 한나라의 노력만으론 불가능하자나요.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들, 세계의 평화활동가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래요.” 그리고 그녀는 성주 사드배치 반대 투쟁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음을 내게 이야기했다. “섬들의 연대에서 섬을 지리적인 위치의 섬이 아니라 가로막힌 섬, 고립된 섬이라고 확장하고, 사드배치라는 지금 국제이슈로 싸우고 있는 성주에도 평화캠프를 추진하는 것을 고민해 봤으면 좋겠어요”
매우 희망적인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 성주의 님비가 아닌 한반도의 사드배치문제로 전국민적인 사안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전국의 사드배치반대 촛불을 밝혀야 한다. 이제 국제연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포문을 열어야겠다.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더 많은 연대의 발걸음을 옮겨가야겠다는 미래의 부푼 꿈을 안고 걸었다.
정부는 지배자들에게 저항했던 강정주민들에게 34억원 구상권을 청구했다. 긴 시간 투쟁하는 동안 주민들 사이는 갈래 갈래 찢어졌다. 마을공동체는 훼손되었다. 강정투쟁에 연대했던 연대자들이 하나둘 내려와 삶의 터전을 잡고 새로운 주민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긴 시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는 못하고 있다. 대행진하는 동안 쉼없이 실무를 해내던 딸기씨에게 이곳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었다.
“강정은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비춰지지만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문제와 너무 많이 얼켜 있어요. 너무 많이 얼키고 설켜 잘 못 풀어요.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에요. 해군기지 건설 찬반 갈등만 봐도 국가가 그들을 갈라놓은 거자나요. 국가가 허황된 개발, 발전 논리로 그들의 눈을 뿌옇게 가렸지요. 외부인, 육지것들, 운동권들이라고 갈라치고 분열시켰던 것은 국가여요. 그 국가의 간교한 전략에 말려든 주민들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던 당사자가 되어있었고요. 사실 우리는 구상권 청구를 철회하는 것보다 진상규명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이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주민들이 왜 갈라질 수 밖에 없었는지, 일차적으로 국가가 조장한 것에 대해서, 엄청난 돈과 법원과 행정이 결탁해서 만들어낸 갈등인데, 이것이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해결될 수 없지 않을까요?”
5박6일의 행진을 마치고 살짝 옆길로 빠져서 제주의 정취를 만끽했다. 제주 강정 11년의 투쟁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주민들이 끝까지 함께 하는 투쟁을 꿈꾸며 성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꿈이 현실로 만들어지는 건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보다. 성주는 내홍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제주 강정의 전처를 밟게 되는 과정에 성주가 접어들은 듯 했다.
#사진출처 : 박승화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