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마음의 쉼표, 보길도

by 독립사회복지사

스물아홉이 되던 해, 서울에서 치열하게 살아오던 나날의 짐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휴식을 갖게 되었다. 평소 가고 싶었던 여행지는 많았지만, 막상 떠나려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단지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해남 땅끝마을이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시작된 여정은 진정한 여행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무료했다. 땅끝마을에서 좀 더 조용히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보길도라는 섬을 알게 되었다.


보길도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고 여객터미널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잡생각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을 슈퍼에서 맥주 몇 병과 안주를 사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검정 비닐봉지에 담긴 맥주를 바라보며 그 안에 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다음 날 보길도로 향했다. 늦가을이라 섬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멍하니 길을 걷다가 검정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에 닿았다. 한참을 앉아 어둠이 내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작은 점이 점차 사람의 형체로 다가오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드넓은 해변에서 우리는 만났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와 그녀는 침묵 속에서 걸으며 어둠이 깔린 몽돌해변을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계절에 홀로 여행하는 사람은 정말로 여행을 즐기거나, 삶의 무거운 짐을 정리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짧은 시간에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에게 따뜻한 한마디는 큰 위로가 된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왜 이곳에 오셨어요?”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답답해서 왔어요.”라고 답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상사와의 심각한 갈등으로 학교를 떠난 사연이 있었다. 준비도 못한 채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나로서는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았다.


짙은 솔잎을 품은 소나무 숲을 걸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끌벅적하거나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조용한 수다를 통해 무겁고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공감은 어렵지 않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믿고 응원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다.’ 같은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함을 준다.


어느덧 섬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을 피할 곳이 필요했다.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니, 지나가던 주민이 시골집 그대로인 민박을 알려주었다. 민박집은 백발의 할머니가 홀로 운영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니 함께하자고 하셨다. 마당 앞 작은 평상 위의 밥상에는 할머니가 직접 키운 채소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된장국이 있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직접 담근 솔잎주를 내어주셨다. 처음 만난 세 사람은 시골 밤의 어둠을 잊고, 재미있는 수다와 웃음을 나누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시골 밤의 수다가 끝나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가 다가와 작은 쪽지를 건네셨다. 쪽지에는 그녀의 짧은 글이 있었다. ‘여행을 만나러 왔어요. 그러나 아직 만나지 못해서 먼저 길을 떠납니다.’ 그 글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꼭 여행을 만나기를 바라며, 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의 여행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섬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사람도, 여행하는 사람도 다르지 않다. 여행은 과거의 나를 내려놓고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섬이 품고 있는 바다, 바람, 돌, 사람을 만나고 생명력 넘치는 음식을 먹으며, 여행자는 메마른 마음과 몸을 되살려 힘을 얻는다. 그리고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언젠가 다시 힘이 떨어지면 섬을 찾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 머무를 수도 있다.


오래전 그녀도 보길도에서 여행을 만나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 돌아가 멋진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순간, 길 떠난 여행자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꼭, 여행을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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