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메시스의 지혜
열흘 내내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중요한 평가 작업 때문이었다. 식사는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두 개의 모니터는 마치 레이저를 쏘듯 내 두 눈을 꿰뚫을 기세였다. 온 신경이 업무에 곤두서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울렸다. 집중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끈질긴 벨소리에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대체의학을 공부하는 친구였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내 말에 친구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스트레스가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 될 거라고. 그리고는 그 단어를 내뱉었다. ‘호르메시스’. 처음 듣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했다.
호르메시스는 하버드대학교 싱클레어 교수가 쓴 ‘노화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 알려진 개념이라고 했다. 너무 강한 독은 물론 해롭지만, 낮은 용량의 유해 자극에 노출되면 생명체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신체적 스트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즉, 나의 건강한 성장을 돕고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자체에서 1년여의 시간과 수많은 사람의 참여를 거쳐 만들어진 결과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쏟아 검토하고 결정해야 한다. 평가받는 일이나 사람을 떠올리면, 평가자는 그 과정에서 마음의 무거운 돌덩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평가를 통해 나의 지식과 경험이라는 갈증을 해소하고, 전문성을 한 단계 높이는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약이 되는 독의 비밀이 아닐까.
가끔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 보던 중국 무협 드라마가 떠올랐다. 무림의 고수들은 때때로 독성을 지닌 곤충이나 동물의 독으로 자신을 단련한다. 무공에 필요한 적당량의 독을 몸에 주입하고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며 독에 대한 내성을 키워낸다. 그렇게 강해진 몸으로 상대의 독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더 강력하게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감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맞는 예방 백신도 비슷한 원리다. 독성을 약화시킨 바이러스 균을 일부러 넣어 몸의 면역력을 높이지 않는가. 몸에 해롭다고 알려진 것들이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오히려 이로운 것이 많다. 과음은 나쁘지만, 약간의 음주는 때로 인체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기도 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종종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떤 이는 주어진 업무를 부담으로만 여겨 힘들어하고, 어떤 이는 그 부담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회사 생활뿐만이 아니다. 일상생활 곳곳에서 우리는 수많은 정신적, 신체적, 물리적 스트레스를 마주한다.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진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한 심장 전문의가 쓴 책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결국 긍정적인 마음으로 삶의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라면,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히고 이겨내야 한다. 그 길고 긴 여정의 끝에는 분명 달콤한 선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매번 새롭고 멋진 동기 부여를 자신에게 선물하는 이가 아닐까.
작년부터 나는 숫자를 세는 방식을 거꾸로 하고 있다. 1부터 10까지 세던 습관을 10부터 1로 세는 식이다. 무거운 숫자를 하나하나 덜어낼 때마다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서는 기분이다. 나쁜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꽤 효과가 있다. 42.195km 마라톤을 완주하는 선수도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길을 돌아보기보다는, 오직 다가오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과 자세가 좋은 선수로 우리 기억에 남는다. 우리 삶의 스트레스 또한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결승점을 향해 나아가는 마라톤 선수처럼 긍정적인 마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