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을 때는 강이나 바다에 엉덩이를 붙이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게 제격이다. 그날도 그랬다. 지인의 모친상이 있어 익산으로 향하던 길, 여유 있게 출발한 덕분에 시간이 넉넉했다. 문득, 고향의 강이 보고 싶어졌다. 한결같이 굽이굽이 흐르며 햇살과 어울려 반짝이는 금강. 다행히 차를 세울 만한 강가에 이르렀을 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빈 의자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의자 위에 일상의 무게가 담긴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유난히 시원하게 들렸다. 등 뒤에 늘 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던 가방. 세 아이를 먹이고 입히는 데 필요한 돈을 벌어다 주는, 나의 삶 그 자체 같은 존재였다. 잠시 떨어져 바라본 가방은 까맣게 그을린 나의 모습처럼 보였다.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몸과 마음이 한껏 시들어 버린 흔적이 가방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그 무렵, 마흔을 훌쩍 넘긴 나는 사회복지사라는 정체성과 지금의 일을 놓고 깊은 혼란 속에 있었다. 두 번째 맞닥뜨린 무기력은 늪처럼 나를 잡아끌었다. 오랜 시간 품어 온 계획과 준비가 무색하게 하나하나 회의감으로 되돌아왔다. “차라리 애초에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리석은 질문이 입술 끝에서 흘러나왔다.
가방 옆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무게가 너무나 버거웠다. 나는 잔디 위에 털썩 앉아 가방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소리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 무슨 생각해?”
“그냥 내가 지나온 삶을 곱씹고 있었어.”
“그래. 잘 살아왔어?”
“글쎄... 나름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고 슬픈지 모르겠어.”
“그럴 수 있지. 새로운 일을 향해 달려가기 전에, 잠시 숨 고르라는 뜻일 거야. 게다가 오늘은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잖아. 마음이 더 무거울 수밖에 없지.”
“네 말이 맞겠지…”
“내가 너를 제일 잘 알잖아. 힘내. 전에도 이겨냈잖아.”
“그래.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걸어갈게.”
짧지만 깊은 대화가 오갔다. 나를 마주한 또 다른 나는 소소한 칭찬을 건네고 따뜻한 위로를 내밀었다. 그렇게 웃음이 번졌다.
열심히 살아도 우리는 번아웃에 빠지고, 아무 의욕도 나지 않는 무기력이라는 불청객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기에 때로는 스스로를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힘든 시간을 무심히 흘려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성과와 실패를 굳이 붙잡아 스트레스로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그 과정에 의미를 두고 싶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이 버거울 땐, 무겁고 검은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숨 고르기를 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다물고 한 걸음씩 내디디면 된다.
나를 옆에 두고 나와 대화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요한 공간에 의자 두 개를 마주 앉히고, 마음속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된다. 그리고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즐겁게 수다를 나누면 된다.
힘든 순간, 나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침묵의 대화는 잊고 있던 나의 가장 멋진 모습을 되찾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