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좋지 않은 생각이 차곡차곡 쌓이거나 마음이 오래 속상할 때면, 나는 어김없이 아버지를 떠올린다. 지난 명절에 찾아뵙지 못했다는 죄송함이 마음 한편을 눌러앉아 있다가, 결국 아버지가 쉬고 계신 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반쯤은 억지로 추슬러 산에서 내려왔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문득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잠시 머물다 떠나야 했던 그 집이 떠올라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있던 다섯 식구의 자그만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쓸쓸한 공터만 남아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깊지 않은 쓸쓸함을 달래주듯 그 자리를 지키고 선 커다란 은행나무가 여전히 나를 맞아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그 은행나무에는 오백 년 전 전우치 장군이 심었다는 전설이 따라다녔다. 어린 나에게 은행나무는 그 이야기만큼이나 크고 압도적인 위엄을 지닌 존재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나무는 학교를 마치고 신나게 뛰놀던 놀이터였고, 무더운 여름날에는 말없이 그늘을 내어주던 쉼터였다. 때로는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나 오갈 데 없던 날,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던 공간이기도 했다.
생각에서 깨어나 은행나무로 오르는 계단 끝에 서자, 예전에는 없던 나무 평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앉아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잊고 지내던 기억을 붙잡아 두고 싶어 손전화 노트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채 시간이 흐르고 목이 뻐근해 잠시 쉬려던 순간, 은행나무 근처에 자리한 작은 시골교회와 카페가 보였다. 문득 카페인이 그리워졌다. 커피 한 잔 들고서 나와 은행나무 그늘에 놓인 평상에 무거운 머리와 몸을 맡겼다.
은행나무 아래 있던 그 집에 좋은 기억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되돌리고 싶은, 차마 꺼내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흰 털과 검은 털이 섞인 점박이 바둑이 한 마리가 함께 있었다. 이름은 ‘번개’였다. 번개는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떻게든 먼저 알아차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짖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나를 반겨 주었다. 은행나무는 번개와 함께 뛰놀던 우리의 놀이터였다.
매미 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우던 어느 여름날, 평소처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집이 거의 보이는 거리까지 왔는데도 번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품은 채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외삼촌들이 와 있었고, 막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어머니를 불렀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엄마, 우리 번개 어디 있어요?”
어머니는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어두운 표정 속에서 나는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서서히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낡은 냄비에 담긴 붉은 국물을 국자로 떠먹던 셋째 외삼촌이 손가락으로 냄비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있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목소리와 그 손짓은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이틀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못한다. 그리고 동물과 정을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은행나무 아래 집의 슬프고 아픈 기억이 내 삶에 깊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뜨거운 여름날, 보신이라며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동물과 정을 나누는 마음도, 그 방법도 어느새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내가 가끔 이곳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의 기억이 나무와 흙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저마다 하나씩의 추억 유리병 속에 담겨 있다. 절대 깨지지 않는 것만 같은 그 유리병 속에서 공간과 자연은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꺼내 놓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유리병이 있다. 나는 지난날들을 그 유리병 속에 담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세월이 흐르며 추억은 우리 곁에서 조금씩 희미해지지만, 나무와 흙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다만 은행나무 아래 살던 그 소년만이 이제는 없다.
혹시 지금 힘겨운 여정 한가운데에 서 있다면, 모든 짐을 잠시 내려놓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있는 당신만의 추억 유리병을 한 번쯤 찾아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