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담 May 13. 2016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희망

어쩌면 차창에 빗방울이 맺혀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마침 김연수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회사가 값을 지불한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음에도, 여행을 떠난다고 느낀 것은.


열차가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국내 어디를 가나 비슷한 역 앞 풍경이었으나, 웬일인지 나는 자신의 뿌리를 찾으러 한국에 갓 돌아온 입양아라도 된 양 낯설고 들뜬 기분이 들었다. 대구에서 나를 맞아준 그는 나보다 연배가 10년 정도 위인 사람이었다. 온화한 미소 속에 강직함이 엿보이는 그는 여러모로 군대에서 내가 모셨던 소령님을 떠올리게 했다. 외모도 닮은 데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말투도 똑같았고 무엇보다 성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느낌이 비슷했다. 그런 그는 나에게 존댓말을 썼고 내가 고개를 숙인 만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와 내가 만난 곳은 주로 수원이었다. 내가 그에게 수원으로 와달라고 하면 그는 항상 은색 양복에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아침 일찍 수원행 기차를 타고 와 나를 만났다. 그는 영락없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업체 대표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태연하게 대기업 구매담당자의 얼굴을 하고 그를 맞았었다. 대구에서 만난 그는 한결같은 모습이었지만 나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입양아처럼 생소한 얼굴을 한 채 그의 앞에 섰다.


그러니까,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빗방울이 맺힌 차창과 좋아하는 작가가 낸 신간 소설의 조합은 불가항력이었다. 무릇 여행을 떠나는 자의 마음이란 내내 치감고 있던 것을 벗어던지는 법이어서, 함께 생활하는 주변 사람보다 여행지에서 잠깐 스치는 인연에게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와 그를 보자 마치 내가 존경하던 소령님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진짜 나이길 원했지만, 그에게 나는 도무지 나일 수가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님'이라고 칭했고 그간 나의 행적에 감사했으며 앞으로도 잘 좀 도와주십사 부탁했다. 진짜 나도 아니고 대기업 구매담당자도 아닌 그 누군가가 어색하게 거만한 이마를 조아렸다.


그의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왔을 것이다. 또 몇 번의 실수 외에는 정도를 벗어나는 일도 없었으리라. 그가 걸어온 길의 어느 한 지점도 자신보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에게 죽는소리를 해야 하는 오늘의 원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나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에게 대접을 받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 따윈 없다. 그것은 우연이다. 우연히, 그와 나는 중소업체 대표와 대기업의 구매담당자로 만난 것뿐이다.


삶은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이어지고,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우리는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고 소설은 적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이 직선적(linear) 일 거라 믿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살면서 닥쳐오는 수많은 시련들에는 아무런 원인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현재까지를 이은 직선을 길게 연장한 지점에 미래는 있지 않을 것이다. 삶은 우연한 시련의 연속이며 그 연속된 점을 이은 선은 앞으로 닥쳐올 시련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연으로 이어지는 점이 큰 각으로 방향을 틀 때, 우리는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어머니 나라에 갓 입국한 입양아와 같은 신세가 된다. 자신의 것이 분명한 과거가 현재의 삶을 대변하지 못하고 현재의 삶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신세.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고,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이 흐른다. 삶의 입양아들은 우연의 심연 앞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낯설지만 가장 진실한 자신을 본다.


열차가 동대구역을 떠나 서울역에 도착할 무렵,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입양아 카밀라 포트만의 여정도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여행길은 미로처럼 얽히고설켜 그녀를 절대 건널 수 없는 심연 앞에 데려다 놓는다. 그 깊고 어두운 심연 앞에 그녀는 무너져 내리지만, 바로 그 심연 속에서 그녀는 참된 자신과 마주한다. 그녀는 심연의 가장 밑바닥에서 우연과 우연이 세차게 굽이쳐 선으로 잇기조차 힘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다. 그렇게 카밀라는 그 심연을 건너와 희재가 된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고 적었다. 중요한 것은, 심연을 통하지 않고서는 말도 온기도 전해질 수 없다는 것, 그중 일부는 분명 심연을 '건너' 간다는 것, 그리고 그 깊고 어두운 심연을 건너간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다는 것. 그는 심연을 건너가는 것은 '희망'이라고 적었다.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은 몇 번이고 우리를 심연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어쩌면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심연을 건너가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둘 다 각자의 심연을 건너가는 중이기에. 깊고 어두운 심연을 건너간다는 희망이라는 것을 믿고 있기에.

작가의 이전글 가장 천천히 뛴다고 생각하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