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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3. 2016

방랑(放浪)

#여행 #야간 버스

늦은 시간 한적해진 사무실을 나와 퇴근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에는 피곤한 안색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서 버스가 떠나기만을 기다린다. 버스가 출발하면 기사 아저씨는 지쳐 보이는 승객들을 위해 버스 안의 불을 전부 끈다. 밖은 이미 어둠이 짙은 지 오래고, 버스 안에도 어둠이 가득 찬다. 어둠 속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우연히 재생한 노래에 마음을 빼앗기면, 나는 어느새 야간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자가 된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내가 있지 않은 곳으로,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창밖의 어둠 속에서 달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춘다. 문득 입사 전 떠났던 인도 여행 중 어떤 풍경이 떠오른다. 델리에서 다람살라까지 야간 버스를 타고 이동했더랬다. 밤새 달리던 그 버스는 그야말로 칠흑 속을 내달렸고, 이방인들의 어깨 틈에서 나는 잠 못 이루고 꼼짝없이 어둠을 견디었다. 길이 나를 이끌어주겠거니 어둠 속에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두려움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나는 분간해낼 수 없었다.


뚜렷한 목적지도, 가고자 하는 목적도 없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길이 이끄는 곳으로 옮겨 다녔을 뿐이다. 방랑하는 마음은 어디론가 흘러가버리는 듯했으나, 늘 나에게로 다시 돌아왔고, 돌아올 때는 꼭 귀한 선물을 가지고 왔다. 그렇게 얻은 선물로 여정은 충만했으며 마음은 종종 벅차올랐다. 방랑이었으되 방황은 아니었고, 방황이었으되 결코 허비는 아니었더랬다.


버스는 금세 익숙한 풍경 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자정에 가까운 도시는 온통 낯 뜨거운 욕망의 파편으로 얼룩져 있고, 그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했는지 누군가는 도시 등저리에 구토를 쏟아놓았다. 고작, 나는 어딘가가 아닌 여기로 돌아왔구나, 깊은 한숨이 내 등을 타고 도시의 뒤통수 위로 흩어진다.


마음을 오늘에 온전히 내어주지 못했다. 내 삶이 오늘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어딘가가 어딘지 몰라 괴로워했다. 모르겠어서 불안했고, 왜 그것도 모를까 한탄했으며, 무릅쓰고 떠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표류하고 있다고, 그리하여 삶을 낭비하고 있다고 나를 닦달했다.


헌데, 목적지 없이 표류하기는 여행 중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정해진 목적지 없이 자유로움에 가슴 뛰지 않았던가. 방랑하는 마음이 가져다준 깨달음에 여정은 늘 충만하지 않았던가. 방랑은 결코 허비가 아니었거늘, 나는 어찌하여 방랑하는 내 삶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것인가.


삶은 늘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 많은 경우 여기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여기의 삶은 자주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었으나, 지나서 되돌아보면 그때 거기에 있었던 것은 필연이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다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방황하던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고 이어져 운명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리라.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지 않다고 하여 삶이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는 있지 않다. 설령 정처 없이 방랑하는 삶일지라도 여정은 언제나 그 안에 씨앗을 품고 있고, 씨앗은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어쩌면 내일도 나는 오늘처럼 여기에서 한숨지을 테지만, 허공에 흩어지는 한숨이 흘러가는 곳에 삶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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