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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 Jul 23. 2015

시작한다, 제주살이

작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다.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뀐 직장생활 6년 차 싱글.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었다는 낯선 사실에 채 적응할 시간도 없이 반복되는 경쟁 PT와 실행 속에서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야근으로 몸은 지쳤갔고, 행사를 하루 앞둔 어느 날 회사 후배가 스스로 세상을 떠나 버린 일이 생겨 마음도 지쳐버렸다. 체력도, 머리도, 마음도 모두 소모되어 결국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또 한번 스쳐가는 권태기일 뿐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래, 어쩌면 그냥 또 한번 스쳐지나 가는 권태기였을지도, 인생은 다 그런 것인데 나만 유난스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멍하게 앉아있을 때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지금 이 삶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익숙함과 안정감 속에 기대고 숨어있던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다른 사람을 알아가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래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족으로 남은 평생을 제대로 살아가며, 아이도 제대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육 개월 동안 계속되는 빨간 날들을 만들겠다고 너는 말한다.

일을 그만두고 낯선 곳으로 날아가 자동차 하나를 사겠다고 한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저쪽 끝에서 다시 정반대 쪽을 행해 차를 몰다보면 너의 서른 살이 조금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찾는 동안, 네가 그 틈에 끼어 네 감정을 케이크 조각만큼 나눠주는 동안, 그 피곤 때문에라도 네 자신이 실망스러웠노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넌 어떤 달리기에서 진 사람 같았다. 그러나 괜찮다. 너는 무려 육 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는 빨간 날들을 만들기로 했으니까, 너는 잠시 동안의 최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조금 울고 조금 웃다가 오래 달리기를 마친 얼굴을 하고 그리운 것들을 찾아 되돌아올 테니까. 세상의 모든 등대를 돌아보고 왔다고 한들, 서커스단에 섞여 유랑하느라 몸이 많이 축났다고 한들 뜨겁게 그리운 것들이 성큼 너를 안아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들은 너를 질투할 것이 분명하니까. 누군가가 네가 없는 너의 빈집에 들러 너의 모든 짐짝들을 다 들어냈다고 해도 너는 네가 가져온 새로운 것들을 채우면 될 터이니 큰 일이 아닐 것이다. 흙도 비가 내린 후에 더 굳어져 인자한 땅이 되듯 너의 빈집도 네가 없는 사이 더 견고해져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안는 것, 그게 여행이니까.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이병률 작가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의 '잘 다녀와'는 꼭 나에게 응원한다고 보내준 편지 같았다. 온전히 나를 위해 육개월 동안 계속되는 빨간 날들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서울을 벗어나 조금은 낯선 곳에서 여행자와 생활자의 경계로 살아봐야겠다. 그러다 떠오른 것은 매년 출장으로 여행으로 찾게 되었던 제주도. 제주도에 있을 때면 막연하게 제주에서 사는 삶을 상상했었다. 문득 그 상상을 이룰 수 때가 지금이구나 싶다.

 서울은 모든 것이 경쟁이었고, 모든 것이 빠른 도시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서만 30년간 살았던 내게 제주도는 신세계와 같았다. 어디서나 나를 내려보는 멋진 한라산과 넓은 들판들,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바다와 한눈에 가득 들어오는 하늘이 있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오롯이 나의 시간에 맞추어 천천히 살아가도 되는 곳이었다.

 아이폰 배경화면 문구인 'stop wishing. start doing'처럼 이제 행동할 시간이다.

 회사에 사표를 낸다. 이미 한번 '휴직'이라는 달콤한 단어에 속아 잘못된 선택을 해봤기 때문에 실수는 없다. 집에는 독립을 선언한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보다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더 어렵다. 부모님은 과년한 딸이 결혼이 아닌 다른 이유로 집에서 나간다는 사실이 몹시 불안하신가 보다. 그래도 난 내 인생 최고로 어려운 선택을 온전히 내가 주체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평생 뿌듯해할 것이다.

 마지막 출근 다음날, 먼저 한 달치 짐만 챙겨서 제주로 떠나왔다. 한 달 동안은 제주랑 친해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한 달 후 2014년 1월, 난생 처음 나만의 주소를 가진다.




맨도롱또똣 中

> 우리 정민이에게 바람 넣은 게 그쪽이죠? 이런데 내려와가지고 한가하게 살라고

> 회사 생활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힘들어했어요.

> 지하철 버스 타고 빡세게 출근해서 회사에서 구르는 거 웬만한 사람들 적성에 다 안 맞아요. 이런데서 놀고 먹고 팽팽 그렇게 사는 게 다 적성에 맞지.

> 이러고 사는 거 한심해 보이죠?

>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네요. 아 뭐 힘들다고 도망 와서 이러고 사는 거 솔직히 루저 아니에요?

> 그렇죠. 그런데, 그 루저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손 들고 졌다고 인정하고 꺼져주는 거 그것도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1. 신구간 풍속

 제주도는 '신구간'이라는 독특한 이사 풍속이 있다.

 대한 후 5일부터 입춘 3일 전까지의 일주일을 말하는데, 제주를 지키는 신이 임무 교대를 하는 날이라 공백기가 생긴다고 한다. 이 때 이사를 하면 아무 탈이 없다고 해서 모두들 이 기간에 이사를 한다. 가전제품 매장에서는 이 기간에 특별 세일도 하고, 이삿짐 센터는 극성수기가 된다. 물론 요즘은 육지사람도 많아지고, 건축 붐이 있어서 예전만큼 어렵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대다수의 집들은 신구간을 앞둔 12월 중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2. 연세

 서울에서 집을 구할 때는 보통 매매, 전세, 월세로 구분하는데, 제주도는 '연세'라는 독특한 개념이 있다. 1년치 월세를 입주 시 한꺼번에 지불해야 하지만 보증금이 굉장히 낮다는 장점이 있다. 가끔 좋은 주인분을 만난다면 월세로 나온 집들도 연세 계약을 하게 되면 한두 달치를 빼주시기도 한다.


#3. 제주도 집 구하기

한 달 동안 제주에서 쉬다 보니 30년간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촌에서는 살기 어렵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서울스러운 오피스텔이나 아파트 같은 거대 빌딩에 살고 싶지 않았다. 땅이 가깝고 이왕이면 흙내음을 맡아볼 수 있었으면 했다. 집다운 집을 사거나 구하기에는 경제적인 부담이 있으니, 그냥 작은 원룸이어도 괜찮다. 이런 집을 구할 때는 부동산 보다는 지인의 소개나 정보지를 활용하는 것이 더 도움이 많이 된다. 처음에 부동산 방문했다가 신제주 오피스텔 빌딩만 주구장창 봤는데, 나중에 보니 부동산 없이 주인과 직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오일장(교차로 같은 신문)을 통해서 집을 구했는데, 예쁜 전원주택이다. 주인 내외분도 옆집 아주머니도 참 좋으시다. 때 되면 귤도 가져다 주시고, 직접 키운 야채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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