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엄마 미자여사는 자궁 문이 7cm열릴 때까지 참았다가 병원에 가서 할머니한테 미련하다고 욕을 먹었단다. 미련하게 그걸 참고 있는 딸을 바라봤던 할머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정도 했으면 나왔어야지. 나는 병원에 새벽 1시즈음에 들어가서 아침 11시정도에 세상에 나왔단다. 하루 넘기는 진통의 고통을 엄마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선물해준 셈이다. 그렇게 고생시켰는데도 엄마는 내가 예뻤단다. 바로 밑에 동생은 참 예쁜 아이였지만 많이 아파서 하늘나라로 갔다. 지금 둘째는 엄마와 아기 중 한명이 죽네 사네 생사를 오갈 정도로 힘들게 낳았단다. 의사선생님이 아빠에게 둘 중 하나 선택하셔야 된다고 할 정도였단다. 막내는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을 한 달가량 했지만 달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 심장이 약해서 크게 울면 안 된다고 했다. 나와 둘째가 조금이라도 울리면 엄마에게 등짝 스메싱을 당했었다. 지금 막내는 나보다 덩치도 크고 키도 크다.
우리 자매 모두 다들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를 너무 힘들게 했다.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도 순탄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봐도 너무 힘들었다. 처음부터 빚으로 시작했고, 오죽하면 내손을 잡고 한강을 갔더란다. 그 후엔 IMF라는 고비도 있었다. 2008-2009경제위기가 왔을 땐 치매할머니를 모셨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세 자매의 현재진행형 사춘기를 겪어내고 있다. 하필 막내가 어려 엄마의 갱년기도 겹쳤다. 이 정도는 애교수준이다. 지칠 법도 한데 우리엄마는 악착같이 지금도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더 멋진 건 이런 이야기를 하나의 경험처럼 이 또한 지나간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나라면 정말 열두 번도 더 죽는 소리 했을 텐데 친정엄마는 단 한 번도 그래서 힘들었다는 말보다는 나는 모든 상황을 기도로 이겨낸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존감이 아주 높은 사랑스런 사람이다. 덕분에 우리 세 자매는 자존감 높은 엄마의 영향으로 아주 잘 살아가고 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이야기 하면 엄마는 가만히 들어준다. 우리가 힘들다고 이야기 하는 상황들이 자신이 겪어냈던 상황에 비해 정말 작은 것임을 이미 알 고 있는 사람의 여유랄까? 이런 엄마라고 왜 안 힘들겠나. 손녀들이 있는 할머니가 늦둥이 공부시킨다고 일하고 있다. 체력적 정신적으로 힘들 것이다.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간다. 자신이 힘든 것보다는 하루 종일 서서일하는 내 걱정 해주느라 바쁘다. 이런 사람이 바로 내 엄마다. 내 아이들이 나중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친정엄마를 바라보는 내 시선 정도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친정엄마의 강한 정신력을 보고 자란 내 삶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내 몸도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들이 이것저것 요구하면 정말 죽을 맛이다. 일 끝나고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차에 타는 순간부터 귀가 윙윙거릴 정도로 모든 말을 쏟아 낸다. 정말 힘들었던 날 “조용!!!!!!!!!”이라고 외쳤다. 아이들 풀이 확 죽는다. 미안하지만 어쩐다. 이미 온몸이 지쳐버렸는데, 집에 와서는 더하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난리 부르스를 친다. 엄마 힘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도 사람인지라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 되어 있는데 직장과 집에서 나누어 쓰려니 죽을 맛이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다가 나를 보니 얼마나 반갑고 신날까 싶지만 나도 살아야 되지 않겠나. 더 이상 화낼 힘도 없었고 기운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그만 소리치고 그만 화내고 싶었다. 나도 내 아이에게 예쁜 말만 해주고 싶은 엄마다.
친정엄마는 세 명이 달려들어 이 소리 저 소리 해댈 때 어땠을까 싶다. 친정엄마는 본인의 힘듬을 속으로 삭히는 방식으로 우리들을 대했다. 자신의 내면 속에 모든 감정을 감추고 지낸 친정엄마는 결국 가면성 우울증으로 한동안 고생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솔직해 지기로 했다. 아침은 어느 정도 에너지가 비축되어 있어서 아침을 활용하기로 했다. 아침에 어린이집을 대려다주는 차 안에서 같이 노래를 불러주고 신나게 이야기했다. 꺄르르 넘어가는 소리에 에너지가 오히려 충전 됐다. 아이들은 고함지르며 조용하라는 엄마가 같이 이야기하고 노래불러주니 그 것으로도 만족했다. 일이 끝난 후 집에 가는 차 안에서는 엄마가 일을 많이 해서 힘들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아이들은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똑똑하다. 힘들다고 이야기 하니 수긍을 하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린다. 키득키득 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대뜸“엄마 힘들어요?”라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이야기 하니 아빠힘내세요를 부른다. 내가 힘들다고 했는데 웬 아빠힘내세요? 그래도 그런 애교에 또 한번 웃고 넘어간다.
아이들도 감정을 다 읽을 줄 알고 어느 정도 생각도 할 줄 안다. 무작정 힘들다고 화만 냈던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진작 힘들다고 이야기 할걸 그러면 아이들도 받아들였을 텐데, 그 말 한마디가 해주지 못해서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고함지르고 화만 냈다. 아이들도 이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표현을 안 하니 지금 힘든지 아까 힘들었는지 미래에 힘들 것인지 예측을 못하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남편과 똑같다. 말로 해야 안다. 힘듬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의미 없이 ‘힘들다’라는 말을 남발하지 말자. 아이들은 똑똑함과 동시에 단순해서 엄마=힘든 사람 이렇게 인식 한다.
엄마는 힘들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배로 넘쳐나기에 어쩔 수 없다. 힘들면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 해보자.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친구에게 솔직해 지면된다. 숨겨봤자 나만 힘들다. 힘들다며 대뜸 화부터 내면 상대방은 내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진정이 된다. 감정 컨트롤이 안 되면 조용히 마음 정리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어떤 이유로 내가 힘든지도 모른 채 두서없는 고민을 털어 놓기보다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왜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왜 힘든지 명확하게 하자. 그냥 힘들다는 표현은 누구나 한다.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힘들다면 왜? 무엇 때문에? 그런지 명확하게 알아보자. 힘들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결 할 수 있다. 들어 주는 사람 힘까지 빼면서 이유 없이 힘들다는 말을 남발하다 보면 결국 주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그냥 힘들다’를 남발하면 정말 나는 누구에게나 힘든 사람이 된다. 왜 힘든지 어떤 점이 힘든지 내가 알고 있어야 극복해내는 힘도 생긴다. 극복하는 힘을 기르다 보면 무엇이든 웃어넘기는 힘도 생긴다. 왜 힘든지 무엇이 힘든지 일기라도 써서 보면 정말 우울증 단계 아니고서야 별 것 아닌 거 가지고 힘들 때가 많다. 꼭 써보길 바란다. 나중에 내 자식들을 바라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새끼들 더 힘들까 걱정하는 때가 오면 당신은 인생의 고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엄마새싹단계기에 이런저런 일들이 많을 것이다. 엄마도 힘들다. 나에게 다가오는 감정들을 인정하고 표현하다보면 위로는 덤으로 찾아 올 것이다.
학창시절 죽을 것 같이 힘들었을 때를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은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힘든 기억은 그때만 겪을 수 있는 기억이다. 훗날 생각해보면 지금의 힘든 경험은 미래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만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조금은 즐기면서 헤쳐 나가보면 더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행복이는 어릴 때부터 말이 조금 빠른 편에 속하는 아이였다. 주변에서 이 또래에 정확한 문장구사 하는 것은 처음 본다며 놀랬었다. 막둥이가 자라는 걸 보니 정말 행복이가 빠른 아이였구나 하고 느낀다. 둘 다 체구는 아주아주 작은 편이다. 항상 반에서 키나 몸무게로 꼴지를 차지한다. 그래도 똑 부러진다.
하루는 자신이 누구누구 때문에 아주 힘들단다. 왜 힘드냐고 물어보니 그냥 이유 없이 자기를 싫어하고 색칠공부 책을 가져가야 자기랑 놀기 때문에 색칠공부를 가져가야된다고 했다. 그럼 그 친구 말고 다른 친구와 한번 놀아보라고 이야기 했다. 요즘아이들이 더 무섭다더니 6살 아이가 나에게 하는 말들이 사실일까 싶기도 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똑같은 소리를 또 한다. 이번에는 축복이도 합세해서 거든다.
나는 어린이집일에 크게 관여하는 엄마는 아니다. 두고 보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에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주말에 할머니 집 가서도 그 아이 이야기를 했다고 하고 내 동생한테도 했다고 한다. 집에 오는 길에 “행복아 그 아이 때문에 많이 힘들어? 엄마가 어떻게 해줄까? 선생님한테 말해볼까?”라고 물었다. 행복이의 대답은 내 뒷 통수를 제대로 가격한 한마디였다. “엄마가 왜 뭘 해줘요?” 행복이는 그저 자신이 힘들었다는 것을 내가 일하고 힘들었다고 이야기 한 것처럼 이야기 한 것뿐이다.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뿐인데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별걱정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알림장앱에 들어가서 보니 행복이가 말했던 아이와 우리 딸은 엄청나게 사이가 좋은 바깥놀이 단짝친구였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복이가 “할머니가 그 친구에게 왜 자기랑 안 놀려고 하는지 물어보래요” 라고 했단다. 자기도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친구랑 같이 문제를 풀어 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도 못하고 그냥 우리아이 걱정만 하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너무 신나게 놀아서 힘들어요 라고 말할 때 내가 “많이 힘들었겠네~힘들면 어떻게 해야 되?” 라고 되물어보면 쉬었다가 에너지를 충전해서 더 신나게 놀았다. 아이는 내 감정을 말하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하고 쉬면서 더 신나게 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린이집 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처음 겪는 일들을 힘들 때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그 친구와 문제가 있을 때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생각해본 후에 다른 아이와도 놀아보고 또다시 모두다 같이 놀이도 해보고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요즘도 가끔씩 그 아이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엄마도 힘들 때는 그저 힘들다고 말하면 된다. 단, 풀어가는 방법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다. 조금 쉬면서 내가 왜 힘든지 생각해보면 방법은 있다. 아이들도 잘 헤쳐 나가는데 어른인 우리는 더 멋지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간다. 분명 내 인생의 뒷산은 무엇보다 멋지게 나를 위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