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들이 보채거나 때를 쓰면 꼭 다음에 해줄게 라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다음에 해줄게’ ‘어린이집 끝나고 해줄게’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게 일상 이였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요구를 해왔다. 다음에 해줄게 라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 했었던 것 같다. 몇 번은 지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요구에 나는 점점 지키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티는 안냈지만 아마 어차피 안 지켜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이들이 서로 의견이 안 맞으면 정말 살벌하게 싸우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까지 싸우나 싶을 정도다. 아이러니한건 그렇게 싸우고도 정말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히히낙낙 엄청난 절친이 되어있다.
하루는 마트에서 한글쓰기와 스티커북을 샀다. 나는 책이나 놀이 북 같은 것은 사달라는 대로 다 사주는 편이다. 특히 색칠놀이와 스티커북은 어릴 때부터 한 번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둘 다 취향이 정 반대여서 싸울 일이 없었다. 물론 몇 개씩 사주는 건 아니고 한권을 다하거나 다해 갈 때 쯤 사준다. 아주 감사한 것은 친정엄마가 중간에 한 두 권씩은 꼭 사줘서 경제적 도움이 많이 된다. 행복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고르라고 해서 누구보다 신중하게 이 책 저책을 둘러보다가 딱 두 권을 골라 오기에 오케이를 했고 옆에서 축복이는 언니에게 시샘이 났는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한글놀이와 자동차 스티커북을 들고 와서 자기도 사야 된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느닷없이 친구들 중에 벌써 한글을 읽는 아이들이 있다며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다. 실컷 놀기도 부족 할텐데 사서 공부를 한다니 내 딸이 맞나? 싶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둘 다 처음엔 서로 자기는 이걸 샀네 저걸 샀네 자랑하기 바쁘더니 갑자기 이유 없이 싸움이 붙었다. 집에 오는 내도록 싸웠다. 집에 도착하면 그만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도착해서는 더 심하게 싸우더니 지잘났네 나잘났네 거리면서 나한테 쓸데없는 말까지 해가며 이르고 울고 난리가 났다. 가만 들어보면 정말 별거 아닌 것이었는데 둘은 서로 속상했나보다. 처음엔 둘이 사이좋게 지내라 그러지 마라 좋게좋게 이야기 했는데 이것들이 들을 생각을 안 하고 완전 마이웨이였다. 결국, 화가 끝까지 나서 “너네 둘 다 안 싸우기로 약속했지! 한 번 더 싸우면 한명은 엄마할머니한테 가고 한명은 아빠할머니한테 가기로 했지! 약속 했었어 짐 싸!” 라고 고함을 지르고 어린이집 가방을 둘 앞으로 던져주었다.
한번 혼내면 어마어마하게 혼내는 엄마임을 알기에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겠다 싶었나보다. 주섬주섬 옷과 장난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내가하라는 대로 하니까 더 열 받는 건 뭔 심보인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하지도 않고 꾸역꾸역 짐을 싸고 있는 애들을 보니 뭐 저런 애들이 다 있나 싶었다. 짐 싸기를 끝내고 문 앞에 세워놓고 당장 나가서 할머니 집에 가라고 했다. 그제야 잘못했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엄마는 한번 말한 거 지킬 거니까 당장 나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더니 행복이는 울면서 신발을 신었고 축복이는 안 갈 거라고 사이좋게 지낼 거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러더니 둘이 갑자기 애틋해져서 가지마라 사이좋게 지내자 거리면서 안아주고 눈물 닦아주고 그렇게 일단락이 됐다. 서로 미안하다며 손을 꼭 잡고 좋은 언니동생 하자며 방에 들어가서 자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울컥해서 엄마가 미안했어. 라며 안아주고 잘 자라는 인사와 그날은 마무리 됐다.
다음날 어린이집 가는 차안에서 신나게 놀다가 축복이가 “엄마는 왜 약속 안 지켜요?”라고 물어보기에 내가 언제 약속을 안 지켰냐고 따졌다. 갑자기 둘이 한 팀이 돼서 날 공격하는데 정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소리 못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다음에 해줄게 오늘 어린이집 끝나고 해줄게 라고 했던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나중에는 진짜 그런 약속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줄줄줄 읊어대는 아이들 앞에서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젯밤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엄마는 약속도 안 지키면서 자기들한테 싸웠다고 했던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던 것인지 분명 둘이 방안에서 쑥덕거린 게 이러려고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신기하면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짜장밥 해주기로 했는데 미역국을 끓여줬다느니 어린이집 끝나고 친구 집 가서 놀기로 했는데 엄마가 힘들다고 집에 갔다느니 아빠랑 키즈카페 간다고 그랬는데 마트가서 아이스크림만 사고 집에 왔다느니 별별 소리를 다해댔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래도 나는 해준다고 해준 게 꾀 많았는데 이 아이들은 해준 것과 상관없이 무엇을 해주기로 했던 것이 중요했다. 그게 약속 이였는데 약속을 수시로 어긴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일하러 가는 길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힘든 와중에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해주려고 노력해서 다른 방법으로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쟤네들이 저러나 싶었다. 자꾸 곱씹어서 생각해보니 결국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무조건. 말 그대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한 경우였다. 아이들이 참 억울 했을법했다. 이대로 거짓말쟁이 엄마가 되기 싫어서 미용실에 도착하자마자 다이어리를 펴서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말했던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날따라 하늘이 나에게 벌을 내리시는 건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가했다. 계속 생각하고 적고 생각하고 적고 하루에 의무적으로 한권이상 읽기로 마음먹었던 책도 눈에 안 들어 왔다. 적다보니 한 페이지 두페이지... 점점 늘어났다. 데려다주는 20분이란 시간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들을 쏟아냈던 딸들을 생각하니 정말 너무나도 억울했었구나 싶었다.
제일 지키지 않았던 것들은 아침밥약속이다. 자신들이 먹고 싶은 메뉴들을 말하면 나는 해줄게 라고 해놓고 해주기 편한 것 위주로 해줬다. 장난감 사주는 약속도 왜 그렇게 많은지 사달라고 하면 ‘다음에’를 남발했던 벌이다. 아이들은 돌아가지 않을 ‘다음에’ 라는 말을 믿고 있었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참 거짓말투성이인 엄마였다. 처음부터 다 지키지는 못하겠지만 그날부터 하나씩 해주기로 결심을 했다. 아침에 미역국이 먹고 싶다던 큰아이에게 내일은 미역국 해줄게라고 했던 기억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에 가는 길에 소고기를 샀다. 저녁에 게임하게 해주겠으니 빨리 신발 신으라고 채근했기에 게임을 하게해줬다. 그날만 해도 약속한 게 7개정도는 됐다. 다지키기 정말 힘들었지만 끝까지 지켰다. 그 다음날 아침에 정말 미역국을 끓여주고 그 다음날 아침은 누룽지를 해주고 그 다음날은 닭고기를 해주고 말하는 데로 해줬다. 축복이는 별로 바라는 게 없다. 식성이 좋아서 감사하게도 주는 대로 얼른 흡입하고 자기 노는 게 더 바쁘다. 고맙다 딸. 아침은 행복이가 원하는 식단에 맞춰줬다. 그렇게 하나씩 지켜나가니 나도 뿌듯하고 아이들도 점점 엄마가 변하는 게 느껴졌나 보다. 서로 무리한 요구를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이 요구 하는 것들 중에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은 해주겠노라 말했다. 오늘 못하겠다 싶은 것들은 언제 해주겠다고 분명히 이야기 해주었다. 못 지킬 것들을 요구할 땐 단호하게 대처했다. 이제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엄마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은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안 되면 속상한 티는 온몸으로 표현하지만 더 이상 때 쓰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잘 지켰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용납이 안됐을 것이다. 다음에라도 해주겠다고 했던 것들은 갑자기 단호하게 안 된다 그러고 안 지키던 것들은 알겠다고 하고 혼란이 왔었다. 그 과정을 견뎌 내는 게 나도 아이들도 굉장히 힘들었다. 그렇다고 지금도 완벽하지 않다. 어르고 달래야 되는 경우도 생기고 화를 내야 되는 경우도 생기지만 그래도 하나씩 맞춰가는 중이다. 덕분에 이제는 “약속했잖아요, 엄마는 왜 안 지켜요?” 라는 말은 안 듣고 있다.
나도 사람인지라 정말 안 지켜 질 때가 있다. 계곡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리기로 했는데 이미 계곡에서 녹다운 되어 버려서 갈수가 없다거나 그런 경우들이 한 번씩 있다. 약속을 지키기가 너무나도 힘들 때 진심으로 사과하고 이유를 말해주며 다음 날이라도 꼭 지킨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명확하게 이유를 말해주면 수긍을 해준다. 그 대신 믿어주고 참고 기다린 것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마라 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에게는 더 묵직하게 적용해야 된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절대 하지 마라. 표현은 안 해도 아이들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설픈 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요즘은 약속을 하나씩 지켜나가면서 아이들과 내가 더 행복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부터 지키려고 노력하니 아이들도 약속에 대해서 신중해 지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자란다. 육아의 달인 책들을 보며 백날 대해봤자 진심이 없는 행동들은 아이들도 귀신같이 안다. 진심으로 내행동 내 감정을 하나씩 지켜나가며 아이들에게 진심을 보여준다면 아이들도 나도 변하게 된다. 내가 이책 저책을 읽으면서 노하우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가면서 노력하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주고 함께 변하려고 하는 ‘지금’이 나는 정말 행복하다. 앞으로 약속을 더 잘 지키는 엄마가 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