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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n 03. 2022

시답잖은 기억인 줄 알았는데

30대를 버티게 하는 추억들

스무 살 여름 방학. 처음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가 뭉쳐서 학산여고를 방문했다가, 우리집에 와서 치킨을 뜯은 뒤 아파트 단지 뒤에서 퐁퐁을 탔다. 그렇게 논 걸로도 아쉬웠는지 밤에 마트에서 수박을 사 들고 동네 하천에 갔다. 이날 A가 뱉은 수박씨가 B의 얼굴인가 팔엔가 붙어서 B가 대판 삐졌던 기억이 난다.


스무살 겨울 방학 땐 C가 수능을 치고 일사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설정한 목표는 어떻게든 달성하고 마는 C는 재수하는 동안 찌운 살을 뺀다고 발레를 하더니 기어코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덕에 목도 일센티 길어졌다. 인간 백조인줄 알았다. 수험 기간 동안 억누른 욕망이 터진 C는 원피스에 반짝이 스타킹을 신고 온천천에 가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산책을 끝마친 우리는 동래역에서 가성비가 가장 좋다는 술집에 갔다. 술찌인 나는 막걸리 몇 잔에 헤롱헤롱 했고 C는 안주를 학살했다.

스물 한 살 여름 방학. 부산에 있던  A와 D가 서울에 놀러왔다. 그때 인사동에서 왕돈가스를 먹다가 옷에 엎어서 새 티셔츠를 샀었다. 새로 산 티의 부들부들한 촉감도 선명히 기억난다. 요로코롬 놀다가 한강으로 넘어갔다. 철없이 낄낄대며 놀고 있던 중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접근했다. 보기 좋아서 사진 몇 장 남기고 싶으니 포즈 좀 취해달라고.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의문을 품었지만 우린 또 최선을 다해 그의 요청에 부응했고, 몇 장 건졌다. 어른뽕이 오를 대로 오른 우리 눈에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은 약간 유치하고 오그라들었다. 요즘 말로 항마력이 딸린 달까.


2022년 5월, 잊고 있었던 2009년 8월의 풍경을 마주하니 왜 눈물이 핑 돌까. 웃기고 즐거운 순간을 포착한 사진인데 말이다. 옛날 사진은 찍힌 시점과 현재의 간극을 상기시켜 1차로 날 슬프게 하고, 찍힌 순간엔 그 아름다움을 몰랐다가 한참 뒤 에야 아름다웠음을 깨달으며 2차로 날 슬프게 한다. 물론 이제는 순간을 포착하는 기술과 이를 즉흥적으로 공유하는 기술이 고도화돼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답다는 걸 쉽게 인식할 수 있다만 손에 쥘 수 없어 애상감이 더해진 흘러간 아름다움은 대체불가능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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