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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19. 2017

서평 : 가난에 대한 상상력이 빈곤하다

매튜 데스몬드 '쫓겨난 사람들'을 읽고

고시텔은 알카트라즈 감옥 같았다 @더 록 스틸컷

대학교 2학년, ‘둥지’를 찾아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기숙사에 선발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부모님께 자취 보증금을 요구할만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선택한 건 월 37만원짜리 고시텔이었습니다. 닭장처럼 설계된 고시텔은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알카트라즈 감옥 같았죠.


부모님께 매달 용돈을 받는 것도 모자라 월세 부담까지 지운 게 못내 미안했던 저는 공과금 부담을 저에게 돌리고 과외와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친구와 멀어졌고 좋아했던 아이와 맺어지지도 못했습니다. 밤샘 과제, 학업에 따른 스트레스에 여드름이 얼굴이 덮쳤습니다. 여름엔 가위에 눌리다 깨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습니다. 제 인생에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할 것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저의 자발적 가난이 제 삶을 이토록 우울한 색으로 칠할 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자발적 가난도 삶을 우울하게 만든다 @프란시스 하 스틸컷

당시 제 가난을 지방에서 상경한 모든 대학생들이 겪는 보편적인 성장통정도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쫓겨난 사람들’을 읽기 전 까지는요. 저는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진 ‘집’의 가치를 평가절하했습니다. ‘내 몸 하나 뉘고 씻을 수 있다면야, 월세가 싸면 금상첨화고’ 정도로. 제 21살이 암흑시대였던 이유가 주거빈곤에서 파생된 자존감 하락일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바닥 친 자존감이 삶의 의욕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요. 가난에 대한 파편적인 편견, 정보, 기억들이 비로소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한 겁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은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끝없이 비참함을 어필해야 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1. 가난 공모전

가난 공모전. 친구가 작금의 복지 시스템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얼마나 고립되어 지내는지(누군가의 도움 없이 사는지), 얼마나 못 배웠는지,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쳤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를 증명해야 비로소 수혜자가 되는 현실을 지적한 말입니다. 이 가난 공모전은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합니다.


가난 공모전은 물질적 결핍에 허덕이는 이들의 인격마저 죽여버립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고 했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의 말처럼요. 각종 수당을 지급받기 위해 경제적 어려움을 증명하는 건 고사하고 스스로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걸 포기합니다. 수당 지급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죠.


가난 공모전은 공동체도 파괴합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 없이 홀로 엄청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애매하게 내 옆에 있는 존재는 서류상 짐만 될 뿐이죠. 어디 이 뿐 일까요. 쫓겨난 사람들 속 팸은 집을 구할 때 집주인의 시선을 의식해 아이가 없는 척을 했습니다. 극적으로 입주해도 아이들에게 입 단속을 시키는 게 우선이죠. 자기 집에서 엄마를 엄마라고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의 무너진 자존감. 아이에게 사랑의 말보다 입 단속을 먼저 시킨 엄마의 새카맣게 탄 속. 이것들이 맞물려 가족의 유대감은 무너지고 개개인의 삶은 생존이라는 블랙홀에 허덕이고 말죠.  
파생되는 문제가 이토록 많은데 왜 이 공모전은 계속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원인을 가난에 대한 빈곤한 상상력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가난'이란 단어를 접했을 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풍경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시스터액트2 스틸컷

2. 가난에 대한 빈곤한 상상력
언론사 인턴시절 ‘상대를 완벽히 이해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개인의 배경, 경험, 가치관 차이 등을 대번에 좁힐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정보의 격차를 줄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란 논지의 해외 칼럼을 재구성해서 카드뉴스를 만들자고 제안했다가 대차게 까인 적이 있습니다. 부장께선 당연한 이야기로 카드뉴스씩이냐 만드냐고 핀잔하셨죠. 저도 제 제안을 면피용 정도로 여겼기에 웃고 잊었습니다.


하지만 쫓겨난 사람을 읽다가 그 문득 그 칼럼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빈자를 완전히 이해하고 (혹은 할 수) 있는가?’란 질문이 시발점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대목에서는 이들의 진흙탕 같은 굴레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끝없이 이어지는 크리스탈의 일탈에 짜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좁힐 수 없는 정보 격차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영원히 그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인정했기에 정보 격차를 줄여나가는 움직임에 가담할 것입니다.  


가난에 대한 상상력이 빈곤합니다.


가난에 대한 상상력이 빈곤합니다. 사실 우리는 사회·경제적 순환에서 파생된 현상으로서의 가난보다는 그것의 풍경을 담은 ‘가난 콘텐츠’에 더 익숙합니다. 그 콘텐츠를 통해 ‘가난하면 이래야 한다’는 도그마를 체득합니다. 거기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이에겐 ‘분수를 모른다’, ‘재기할 의지가 없다’는 비판이 뒤따릅니다. 200달러짜리 크림을 사고 랍스터를 맛있게 구워먹은 러레인에게 따라붙던 그 비아냥처럼 말입니다. 이런 비판은 그들을 구제불능의 사람으로 한정합니다.


상상력의 빈곤은 정치 과정으로부터 이들을 배제시킬 수도 있습니다.


상상력의 빈곤은 정치 과정으로부터 이들을 배제시킬 수도 있습니다. 정치는 일종의 재분배 과정입니다. 한정된 재화와 기회를 조정하고 공적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단계죠. 이 과정에서 제안을 관철시키려면 상이한 이해관계로 얽힌 사회 구성원들의 설득하는 게 우선돼야 합니다. 만약 사회구성원 상당수가 빈곤과 가난을 두고 ‘도덕적 해이’니 ‘노오오오력을 안한다’니 단정해버리면 주거빈곤 정책은 등한시 될 것입니다. (필자는 가난이 저소득의 산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착취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지적했죠) 복지, 주거빈곤 정책이 정치 과정에서 우선순위를 점하려면 이들이 처한 상황과 삶에 대한 설명이 좀 더 필요합니다. 가난에 대한 상상력이 좀 더 풍부해져야 할 시점 입니다.


- 본 게시물은 매튜 데스몬드의 '쫓겨난 사람들'을 읽고 쓴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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