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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19. 2017

쌤, 잘 지내요?

선생님을 추모하며

벌써 객지사람 다됐다.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잘못타서 겨우 집에 왔다. 저녁 먹고 호기롭게 마실 나갔다가 막차 시간을 놓쳐서 한 번에 올 거 버스 두 번 타고 왔다. 이 참에 추억투어 한답시고 네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었다. 한때 최애 간식이었던 불오뎅, 아지트였던 던킨도너츠 터를 지나 장산초등학교까지 왔다. 한때 내가 여길 누볐었지 룰루.

문득 한 상점을 지나다 지난 기억이 나를 때렸다. 고등학생 때 그 인근의 한 주점 앞을 지나다 학교 선생님들이 막걸리 마시는 모습을 목격한 일. 선생님들의 나사 풀린 모습에 당황한 나는 후다닥 몸을 피했고 다음날 친구들에게 경고했다. 야 그쪽에서 반여, 재송라인 쌤들 술 먹드라 느그들 조심해라 마주칠라. 그 선생님 틈바구니에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인 홍종업 쌤도 계셨다.

쌤과 나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었다. 하루는 밤에 산책하다가 쌤과 마주쳤다. 홍쌤은 깜짝 놀라셨다. 다음날 반 친구들 앞에서 이걸 소재로 놀렸다. 키도 작고 까만 애가 아는 척해서 그림자가 말거는 줄 알았다고. 모두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1학년 4반은 그렇게 화목했다. 그땐 야자시간마저 즐거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대학입시가 일상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의 말과 지시를 중히 여겼지만 정을 주진 않았다. 호불호는 있었지만 가슴에 남는 스승은 없었다. 졸업하고 딱 한번 놀러간 이후로는 한 번도 학산여고를 찾지 않았다. 한때 내 세상을 채웠던 선생님들은 그렇게 쉽게 잊혀졌다.

홍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솔직히 슬프기보단 놀랐다. 그 젊은 분이 어쩌다 편찮으셨을까. 좋은 분이셨는데 안타깝네. 내 기억에 각인된 세월과 진짜 시간의 편차가 크구나. 죄송하지만 이 정도였다. 내가 사이코패스 돋게 무덤덤한 게 아니라 실감 나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비보는 짧은 탄식과 함께 일상에 매몰되고 말았다.

헌데 몹쓸 막걸리집이 발목을 잡았다. 갑자기 선연해진 선생님에 대한 기억에 명치를 맞은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막걸리집에서 해맑게 웃던 홍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파트 단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 얼굴의 큰 콧구멍도. 그쯤 난 버즈의 가시를 열심히 들었었다. 따뜻 달콤한 봄 냄새가 피어오르던 계절이었지만 옅은 추위 때문에 밤엔 교복 마이를 걸치고 다녔다. 어두운 상점 앞에서 잊고 있던 조각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쌤, 너무 쉽게 잊어서 죄송해요. 사실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는데. 내일 우리 반장 지영이 결혼해요. 신기하죠. 아직 실감 안나요. 걘 워낙 독종이니까 잘 살 것 같아요. 거긴 어때요? 우방아파트 후문에 있는 호프 같은 덴 있나요. 쌤 예전에 엄마랑 거기서 맥주 마셨잖아요. 나도 쌤한테 술 한번 사달라고 했어야했는데, 안부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다시 한번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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