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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15. 2017

기억 속 두 손

사람이 이렇게 미련하다

부산 집에 낡디 낡은 마이크가 있다. 카키와 회색 중간쯤의 색상에 누가바 같은 모양새다. 마이크 상단엔 세월이 누적된 침 냄새가 난다. 나는 그 오묘하고도 비릿한 냄새가 신기해 연신 킁킁댔다. 그 냄새가 역해질때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빤 왜 이 고물덩어리를 버리지 않지? 집에 가라오케가 설치된 것도 아닌데말야.


답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한참 누군가에게 빠져있던 나는 아빠도 엄마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 적 있냐고 물어봤다. 아빠는 그렇다고 말했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해달라고 했다. 아빠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윽수 대단한 인연 이런건 아이고 동네 친구였다. 아들 여럿이 같이 댕기면서 놀고. 갸도 우리집에 수시로 와서 말봉(*우리 아빠이름)아 놀자~하고 그랬지. 한번은 아들끼리 어울려서 같이 노래 부르고 놀았그든. 그때 집에 그 마이크 있제? 그걸 갸가 두 손으로 꼭 잡고 노래하는데 그 모습이 그래 이쁘드라” 아빠는 그녀가 두 손을 포개 마이크를 잡는 동작을 따라 취했다.

추억은 잔혹하리만치 오색찬란하다

꿈결 뒤 현실은 냉혹했다. 아빠는 수 십 년 뒤 우연한 기회로 그녀와 만나게 됐는데 길에서 마주치면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더란다. 하지만 아직도 그 마이크를 보면 그때의 연정이 떠오른단다. 아빠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쉬르리얼리즘과 하이퍼리얼리즘을 오가며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빠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엄마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아빠의 모습. 그 순간 느낀 건 질투 아닌 동질감이었다. 그때 상대의 사연 있는 고집엔 관대해지자고 결심했다. 침 냄새나는 카키색 마이크를 용인하는 것을 포함해서.

영원은 몇 초에 불과하다.

아버지 덕분인지 남자친구들의 전 사랑에 관대한 편이다. 오히려 궁금해 한다. 저들도 기억 속 두 손이 있겠지. 그 두 손 덕에 오늘 날 그가 내게 한 손을 쉬이 내줄 용기를 얻었겠지. 때로는 그 두 손과 내 손이 달라(내 손이 유독 작고 통통한 것 때문이리라)싸우기도 했다. 나는 다른 두 손이 빚은 흔적과 공존하고 때로는 대결하며 그렇게 내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eternity was a second

eternity was a second란 노랫말을 좋아한다. 알리샤 키스의 노래에 나오는 대목이다. 한글로 ‘영원은 몇 초에 불과했지’ 정도겠다. 아빠의 그녀가 마이크를 포개 쥔 그 순간도 단 몇 초, 길어야 몇 분이지만 마이크는 아직 집에 있다. 사람이 이렇게 미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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