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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21. 2017

서평 : 당신은 어떤 노동자입니까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을 읽고

#1. “XX씨...미안하게 됐는데...” 그것은 해고의 언어였습니다.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왕십리 엔터식스에 있는 한 카페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었죠. 빙수 특수가 시작되는 6월 말에 채용된 저는 일터가 카페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빙수만 만들어댔습니다.

그러다 가을이 되고 빙수 매출이 뚝 떨어지자 근속 시간, 처리 가능한 업무량이 가장 적은 제가 1순위로 해고된 것입니다. ‘우리 딸 같아서’라며 저를 채용했던 사장님은 ‘성인이니까 너도 이해하지?’란 말로 우리의 계약관계를 매듭지었습니다. 당시 저는 ‘업무 미숙자’란 이유로 법정 시급보다 몇 백원 덜 받았던 상황이었죠. 후텁지근한 여름 날카로운 첫 먹튀의 경험은 제게 빙수팔이라는 웃픈 별명을 안겨줬습니다.


#2. “내가 5년만 젊었어도 XX씨한테 대시했을거야”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출근해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메인홀로 가던 길에 마주친 레스토랑 지배인이 제게 한 말입니다. 처음에 호의인줄 알았던 그의 친절은 점점 추파가 되었습니다.

일터로 향하던 무거운 육신에 마음의 짐이 더해졌습니다. 특히 늦은 시간까지 그와 있어야하는 마감조 날이면 알바가 가기 싫어 바둥바둥 거렸습니다. 유학자금을 모으고자 시급 높은 레스토랑을 겨우 찾았는데 뜻밖의 복병의 등장에 앞길이 막힌 겁니다. 레스토랑의 얼굴 마담격인 지배인에게 정면으로 맞설 용기도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일을 관두고 고향에 내려가 학원 강사와 과외로 돈을 벌기로 했습니다.      


사례1에서 저는 사장의 ‘합리적 판단’ 하에 해고됐습니다. 상대적으로 시장가치가 떨어졌기에 해고 최우선순위에 오른 셈이죠. 그러나 사례2의 저는 썩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지배인에게 항의 한번 못하고 퇴사라는 강수를 뒀으니까요. 상당 수준의 매몰비용과 기회비용을 감내하고서 말이죠. 저는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시장은 청산된다’는 문장의 냉혹함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이 짧은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무수한 삶의 풍경과 고민을 생략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냉혹합니다. 알바는 을만도 못하니까요 @알바몬 광고


내 안에 수령님 있다


“아직도 김일성 주석 탄신일 행진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한 탈북인이 제 친구에게 한 말입니다. 당시 미국에서 석사 중이던 친구는 지인의 소개로 탈북자와 대화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친구는 내심 체제에 대한 배신감, 북측의 삼엄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꺼낸 건 뜻밖의 추억이었습니다. ‘인민’이라는 부여받은 지위가 여전히 그의 자아의 일부로 작용하고 있던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냥 웃을 수 없었습니다. 저와 그는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유명 백화점에 입점한 도넛 가게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백화점 입점 매장의 종업원들은 의무적으로 서비스 교육을 이수해야했죠. 당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이 고급스러움을 유지시키는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동인이 됐습니다. 직원들만 공유하는 암호는 애인의 별칭처럼 각별했습니다. 최저시급 겨우 넘긴 월급에도 뿌듯함은 견고했습니다. 저 역시 ‘경제적 주체’라는 부여받은 지위에 취했던 겁니다. 제 안에도 (실체는 없지만) 수령님이 계셨던거죠.

우리를 자발적인 노예로 만드는 메커니즘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스틸컷

노동의 배신에서도 유사한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약물 검사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자질’을 평가받습니다. 월마트에선 창업주 찬양에 가까운 연수를 강제합니다. 월마트의 ‘시간 도둑’이라는 금기는 근로자들의 기본권(이를테면 화장실 편안하게 다녀오기)마저 박탈해버립니다. 하지만 책 속 등장인물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초조해합니다. 오죽했으면 ‘약물 검사 무사 통과 보장’ 시장이 암암리에 생겨나고 홀리는 자신의 아픈 몸보다 프로 일꾼로서의 존엄을 더 중시했을까요.


바로 시장은 청산되지만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스스로 자기 착취의 덫에 뛰어드는 걸까요. 바로 시장은 청산되지만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 때문입니다. ‘시장의 청산’은 내 의지와 무관한 분야입니다. 경제학적으로는 노동시장의 공급과 수요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고용이 달성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고용주와 사용자의 영역입니다. 더구나 고용주와 사용자는 스스로 청산의 주체가 되기 위해 ‘시간 도둑’, ‘약물검사’ 같은 도구를 적극 이용하죠. 하지만 ‘삶’은 노동자를 포함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의 과업입니다. 이들은 노동시장에서의 부당한 처사, 열악한 환경 등을 인지하고도 그것을 감내해야 합니다. 생존이 급하니까요. 여기서 발생한 딜레마는 이들을 빈곤의 둘레에 가둬버립니다.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다'는 수남의 바람이 사치일까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스틸컷

어쩌면 경제적 주체는 허상이 아닐까요. 경제적 주체로서 노동자의 지위인 ‘가계’는 정부, 기업에 세금과 용역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서비스와 소득을 얻는 자리입니다. 이들이 제공하는 세금과 용역, 그 대가로 얻는 서비스와 소득은 동치해야 합니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기본 상식이죠. 헌데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가 통하는 곳이 바로 ‘시장’이라는 공간이니까요. 노동자 스스로도 버는 돈의 액수로 자신의 깜냥을 재보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이 시장에 갇히면 생각도 시장에 머물고 맙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도 노동의 배신을 통해 이 메커니즘이 교환의 순환이 아닌 착취의 순환임을 지적하고자 했던게 아닐까요. 책속 노동자들은 용역을 제공하고 삶을 ‘연명’할 수준의 소득만 얻었을 뿐 그 이상은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노동의 배신이자 노력의 배신인 셈입니다.  


더 이상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노동자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 첫 단계는 경제적 주체라는 주입된 지위에서 벗어나 ‘사회적 주체’로 개개인이 우뚝서는 일입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경제적 주체가 아닌 사회적 주체로서의 노동자입니다. 일꾼이 되기 전에 자신이 받고 있는 임금이 제공한 용역에 상응하는지 계산할 줄 알고 부당한 일에 항의할 줄 아는 시민이 돼야합니다. 월마트 휴게실에서 어느 여성과 결의를 다졌던 바버라처럼 말이죠.


노동자의 지위가 경제적 주체로만 한정되면 노조는 평생 ‘귀족노조’, ‘강성노조’라는 꼬리표와 이별할 수 없을 겁니다. 쟁의의 명분을 ‘돈’에만 두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삶에의 열망이 ‘철밥통’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리는 만큼 큰 비극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노동자인가요. 지금의 일터에서, 과거의 일자리에서 어떤 부당함을 감내해야 했나요. 일터에서 가장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 워킹푸어를 가난의 굴레에 가두는 걸까요.  노동 시장의 허점과 착시현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 좋겠습니다.


본 글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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