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스러운데 빠져들었다
헬창이라는 말, 어감과 어원 모두 상스러운데 입에 착 붙는다. 나도 모르게 헬창을 거론하며 키득댄다. 비속어나 은어가 사회구성원을 결집하는 역할을 한다는 걸 헬창을 통해 체감한다.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렸던 4월, 올림픽 공원 어느 한 구석에 옷이 잔뜩 널려있는 걸 목격했다. 웃통을 깐 중년 남선들이 한데 모여 쇠질을 하고 있었다. 육중한 체구를보니 예사 헬창들이 아니다. 헬스장 폐쇄로 근손실의 공포에 떨었던 그들은 야외에서 회포를 풀고 있었다. 그들은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의 모습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을테다. 더 황당했던건 그 광경을 넋놓고 보던 남자친구다. 남친은 개나리 옆에서 내 사진을 찍어주다 말고 송파구 헬창들의 쇠질에 심취했다. "당장 셔츠벗고 저기 뛰어들고 싶어. 오랜만에 가슴이 설렌다"고 말해 나한테 등짝도 맞았다. 꽃구경 갔다가 코로나로 못 간 헬스장이 그리워지는 갑분헬의 순간. 바이러스가 자유롭게 세상을 누빌때 머슬인들의 육신은 속박당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포에 가장 눈에 띄는 근육을 사수하지 못하는 모순. 코로나 아이러니다. (말이 그렇지 남친의 체형이 막 우락부락한건 아니다) 그 뒤 헬창밈이 우리의 개그 코드에 포함됐다. 국내 유머 커뮤니티가 낯선 남자친구에게 B급 유머의 정수 언더아머 단속반도 알려줬다. 내가 잘못을 저지른 날엔 아메리카노 기프티콘 대신 프로틴 스낵 교환권을 줬다. 필라테스 후 통화하면 '오늘은 어느 근육을 썼냐'고 물어왔다. 세상에 지방 깊숙이 숨은 내 근육의 안부까지 궁금해하다니. 얼마 전 드라마 작가를 준비하는 전 룸메이트가 집에 놀러왔다. 친구가 신작 이야기를 해주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냐고 물었다. 곰곰히 생각하다 '헬창물'을 제안했다. "헬창 드라마 어때? 헬스하는 남자랑 필라테스하는 여자가 예송논쟁 뺨치는 겉근육 속근육 논쟁 벌이다 눈맞는거. 둘이 이별 위기때 근손실 날까봐 눈물도 안흘림" 제목은 데드리프트가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늘 식사하고 왕십리 일대를 걷다가 남자친구의 걸음이 돌연 멈췄다. 그의 시선은 '근력 학교'라는 간판에 머물러있었다. 올림픽 공원때처럼 '설렌다'는 표현과 함께. 더위가 꺾이는 하반기부터 같이 운동을 할 생각인데 뭘 해야할지 고민이다. 지금까지 거론된건 주짓수와 무예타이. 비틀고 후드려 패면 사이가 더 돈독해질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