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지 않은 복권은 칭찬이 아니다
나는 키가 작다. 어깨 좁고 작은 몸통에 비해 팔다리가 두꺼운 편이라 소위 말하는 비율도 구리다. 난데없이 웬 셀프디스 시전이냐 싶겠지만 디스보단 자기소개에 가깝다. 그래 난 이렇게 생겨먹었다. 그 잘나가는 레이디가가도 무대 위에서 미친 듯 구르고 흔들며 I was born this way라 외치지 않았던가.
내 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수없는 망상과 고뇌를 거쳐야했다. 외계인에게 납치당했을 때 내 생체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키를 키워달라 부탁하는 망상이나 갑자기 3차 성징이 시작돼 하루 만에 훌쩍 자란 상상은 이제 클리셰다. 청바지를 수선하지 않는 건 어떤 기분일까, 엄마 옷 빼앗아 입은 것 같단 말을 언제쯤 듣지 않을까.
엄마에게도 내 키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딸을 ‘보통’으로는 키워야 한단 사명에 보통 이하의 신장이 걸림돌이 된 탓이다. 엄마는 머리를 기르면 키 작아 보인다고 뭐라 하고 쬐그만한게 맨날 낮은 신발을 신는다고 투덜댄다. 어릴 땐 그 말 하나하나가 상처였고 단신이라는 내 특징이 중대한 결격사유인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몇 센치의 착시효과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할 자신이 없어 이제 능청맞게 답한다. “내 있는 그대로 예뻐 해주면 안 되나 그리고 내 몸에도 장신 유전자 있다이가.” (놀랍게도 우리 외가 식구들은 초장신이다)
그러나 시간을 이기는 건 없다고 했던가, 이젠 나를 그냥 받아들인다.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작은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이 누적되면서다. 나를 꼬맹이라고 부르는 오랜 친구와 고목나무와 매미처럼 붙어 다닐 때의 편안함, 키 큰 친구들의 팔걸이나 핫팩이 되어줄 때의 온기나 강풍이 풀어 닥칠 때 친구 뒤에 숨을 수 있는 작은 특권 같은 것들 말이다. 친구들의 장난이나 자학 개그도 즐긴다. 자연스레 나나 타인의 ‘타고난 것’은 건들지 않겠단 철학도 생겼다.
물론 힘겹게 일군 단신의 호수에 잔물결이나 파도가 일 때도 있다. 누군가가 가정법을 들이 밀 때가 그렇다. 이를테면 ‘너가 키가 컸더라면 괜찮았을텐데’식의 화법 말이다.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할 수 없고 분간한 가치도 없는 그런 말들. 정말 숱하게 들어왔다.
키가 직업 선택의 자유나 사회 진출의 걸림돌이 될 까봐 우려하는 말이라면 들어는 줄 수 있는데 그냥 ‘외모’에 국한해서 하는 말은 한없이 불쾌하다. 예전에 누가 ‘키 크셨으면 ㅇㅇㅇㅇ라도 하셨을 분’이라고 (칭찬이랍시고) 말했는데 그렇게 기분이 드러울 수가 없었다. 남의 생각까지 내가 막을 순 없다만 당사자에게 발화하는 건 실례라는 걸 모르나. ‘그리 말하는 님의 사고회로는 괜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라고 응수하지 않은 걸 아직도 후회한다.
제발 무턱대고 가정법을 들이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하찮은 가정이 ‘보통’이라는 기준치를 맞추지 못해 가슴앓이 하며 다져온 한 사람의 세상을 균열 낼 충격이 될 수 있단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선택한 일을 감당하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내 의지 밖의 일로 마음의 부담을 안고 사는 건 너무 소모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