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있으신가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의 나이를 알 길은 없지만, 살아온 날이 몇 년이든 그 시간은 당신의 전부이기에, 평생을 마음 붙이고 살아온 대상은 특별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어느 순간 강렬한 느낌을 당신에게 선사했을 것입니다. 지금 살기 바빠 그 순간을 잠시 잊고 계셨을 수도 있지만, 저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존재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았다면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 확신해요.
제가 경험한 강렬한 느낌은 그에게서 멀어질 때마다, 생의 이유를 잃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불씨로 살아있다가 저를 다시 그에게 데려다줬습니다. 그런 밀고 당기기의 반복은 제 인생 내내 계속되었고 그는 어느새 뭐 하나 특출 나게 잘하는 것 없고 사랑하는 것 없는 저의 유일한 존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내내 깨닫지 못하다가 근 1년간 다양한 그의 모습과 만나면서 그가 저의 안식처이자, 애인이자, 가장 친한 친구임을 인정했습니다.
그와의 첫 만남이 선명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기를 써서 제출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글을 잘 쓴다며 제 글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도,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주기도 하셨던 기억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글쓰기는 그때의 기억으로 제 마음 한구석의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는 걸 불씨에 비유씩이나, 할 수도 있겠죠. 심지어 그렇게 잘 쓰지도 못해서 상을 받아본 기억도 없지만, 그래도 저는 늘 저와 함께했고 함께할 거라는 이유만으로 글쓰기가 특별해요. 가족도, 친구도, 좋아했던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거든요.
고등학생 무렵부터는 제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이 없었어요. 하지만 오히려 저만 보는 공간에 더 많이, 꾸준히 썼어요. 학창 시절 제 글은 자학과 조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한 날이면 순식간에 자기 비하로 몇 페이지를 채웠고 그건 결코 아름다운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 그 글을 읽을 때면 마음이 끝없이 내려앉는 기분에 글자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조각조각 찢어 버렸습니다.
그 시절 제 유일한 글쓰기는 일기였어요. 글을 ‘배출’했죠. 주제 있는 글이나 퇴고는 꿈도 못 꿀만큼 게을렀고 어휘력도 최악이었어요. 그래서 몇 분만에 써 내려가던 일기와는 다르게 학교에서 백일장이라도 해서 하얀 원고지를 펼칠 때면 머릿속이 까맣게 물들었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엉켜서 마음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 기분. 당연히 상도 못 받았어요. 그래도 글쓰기를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글로라도 감정배출을 안 하면 제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요. 여전히 형편없는 문장들이었지만 글이 곧 저고 제가 글이었어요. 누구에게도 솔직할 수 없었지만 활자만은 가장 솔직했죠. 신기하게도 그 시절 썼던 글들은 나중에 저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작년에는 제가 이토록 오래 곁에 두었던 글이 별로일지언정 공개적인 공간에 전시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제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습작들을 마구 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축 쳐져있는 글만 주구장창 썼는데요, 블로그에 제 기록이 쌓여갈수록, 그리고 그걸 불특정 다수가 본다는 생각이 들수록 글은 다른 모습의 저도 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저를 기록하는 날도 있었지만 글을 쓰면서 새로운 저를 발견하는 날이 많았어요.
조회수가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명이라도 제 글을 읽는다는 생각에 좋아하는 몇 개 글들은 퇴고도 여러 번 해봤어요. 글을 ‘완성’해보는 경험은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편안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썼던 글을 찢지 않고 이게 나지, 하고 웃음을 띄우고 있더라고요. 작년은 제 글쓰기 역사의 세 번째 변곡점이었다고 생각해요.
글은 저에게 아주 어렸을 때는 자아 형성의 시작이었고, 학창 시절에는 숨을 터놓는 대나무숲이었으며 지금은 제 다양한 모습을 찾기 위한 수단이자 저 자체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잔잔하고 따스한 온도로 저와 함께할 거예요.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은 세상이지만, 떠다니는 감정들과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잊을 기억들을 느리지만 섬세하게 관찰하며 활자로 남기는 중입니다.
다음 글은 이십 대 초반의 사춘기를 기록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