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을 말할 수 있을까
이별, 헤어짐. 죽음으로써 이별한다는 문장은 성립이 되나? 죽음은 사라지는 일 아닌가. 안녕을 고하는 마음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작년 2월 무렵,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까운 가족이었다. 할머니 손이 길러진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었지만 아장아장 걸어 다니게 되었을 무렵 반짝이 공주 옷을 입고 할머니 앞에서 재롱잔치를 펼쳤고, 사춘기 시절 무뚝뚝했지만 주기적으로 할머니 댁에 갔다.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는 혼자서도 지하철을 타면 20분이 좀 넘게 걸리는 할머니댁으로 갔다. 할머니는 나랑 내 동생, 아빠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만 엄마에게는 얼음처럼 매섭고 겨울바람처럼 쌀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인식한 후부터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손녀로서 수동적으로 변했던 것 같다.
아빠가 시켜야 전화드리고, 아빠랑 같이여야 할머니 댁에 가던 내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했던 이유를 돌아보면 할머니가 어느 때부터 나에게 서운함을 가감 없이 표현하셨다. 그전에는 나랑 동생을 사랑하시지만 평소에는 쿨하고 무뚝뚝하신 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오랜만에 가면 왜 이렇게 할머니 보러 안 오냐고, 일이 있어서 일어나면 왜 벌써 가냐고, 또 올 거냐며 감정표현이 스스럼 없어지셨었다.
난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와 나와 할머니의 관계를 분리해서 보기 시작했고, 엄마도 사랑하고 할머니도 사랑했다. 엄마도 날 이해했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기운은 없어지고 목소리도 귀를 쫑긋 세우면 안 들릴만큼 작아지셨어도 전해지는 감정은 선명해서 , 그 시절의 할머니는 예쁜 색깔의 아주아주 얇은 손수건 같았다. 아마 아프셨던 시기가 그때쯤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전공을 배우면서 그때의 할머니 생각이 난다. 이래서 아프셨구나, 저래서 병원에 그렇게 자주 가셨구나, 어느 순간부터 내 포옹조차도 힘겨워하셨구나 떠올린다.
사람은 떠날 시기가 가까우면 변한다는데 그때의 나는 타인의 감정에 정말 무감했어서 그냥 사랑과 의무감, 약간의 부담만을 느꼈었다. 할머니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감정을 교류하는 대화보다는 의무적으로 말을 많이 했었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해였던 고 삼 때는 내 일상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나날의 연속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고 억지로 밝고 건강한 흉내를 냈던 것 같다.
공부도 안 하고, 외로웠고, 스트레스만 잔뜩 받았던 고 삼 시절이 끝나자 나는 마법처럼 괜찮아졌다. 밝은 척하는 게 아니라 점점 밝음과 차분함 사이 어딘가의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갔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커튼치고 다니던 머리카락을 넘기고 마주치는 동창과 인사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대화 한번 안 해본 친구 둘과 롯데월드를 가게 되었다. 원래의 나라면 당연히 거절할 문제였겠지만, 이렇다 할 친구가 1년 내내 없었던 그때의 나는 훅 들어온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의 마침표를 찍는 날마저 혼자 외롭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롯데월드로 가는 길에 별로 안 친한 동창을 만났는데 서로 어디 가는지를 물었다. 그 친구는 할머니를 보러 간다고 했고,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고 했었나, 할머니의 시간은 자기와 다르다고 했었나.. 그 비슷한 말을 하며 이제 고삼도 끝이니 자주 들를 거라고 했다.
그 말에 꽂혀서 나도 얼마 안 있어서, 정말 며칠 후에 혼자 할머니댁에 오랜만에 갔다. 할머니는 여전히 기운 없으셨지만 나를 누구보다 반기셨다. 사실 그날의 기억은 흐릿하다. 선명한 기억은, 또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대학에 합격한 날, 아빠가 할머니께 전화드리라고 해서 합격 소식을 전했고, 다음날 할머니가 떠나셨던 일이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하셨기에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슬픔 다음으로 든 생각은 찾아봬서 다행이고, 합격 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거였다. 마지막까지 또렷한 정신으로 계셨기에, 이제 성인이 되는 손녀가 제 살 길을 잘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며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일곱 살 때 겪은 외할아버지의 죽음 다음으로 겪은, 실로 완전한 상실이었다. 엄마가, 사촌언니들이, 이모들이 눈시울을 붉혀서 따라 울었던 그 어린 시절과는 달리 오롯이 나의 감정으로 인해 울었다.
애들은 집에 가 있으라던 말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발걸음을 돌리던 마지막 날, 엄마의 눈물 섞인 전화에 지하철의 퇴근길 인파를 헤치고 사람들의 눈총에도 미친 듯이 달렸던 기억. 온통 하얀 중환자실에서 할머니를 꼭 붙잡고 마지막 인사를 하던 기억. 삼일 내내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을 지켰기에 젊은 할머니의 사진 앞으로 향이 올라가던 장면과 할머니를 사랑했던 사람들(대부분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 목놓아 울던 모습, 아빠의 친구분들과 회사 동료분들, 고모들의 지인들과 무거운 얼굴로 맞절하던 기억 모두 선명하다. 그냥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가도 눈물이 났지만 고모가 울면 슬픔 그 이상의 감정이 뼈저리게 스몄다. 심장이 아주 아래까지 떨어지곤 했다. 그 이유를 지금 돌아보면 내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미래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마주할 가장 부정하고 싶은 미래. 입관식 때, 고모가 ‘엄마, 잘 가….’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기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고모의 목소리와 추운 시신 보관실의 온도, 하얗고 작고 평온해 보이던 누군가의 어머니는 그렇게 모두의 곁을 천천히 떠나고 있었다. 화장을 진행할 때면 침착해 보이기만 하던 상주분들이 기절하거나 그 직전까지 가던 기억이 선명해서, 할머니를 자연 태초의 상태로 보내드리던 순간, 아빠의 손을 꼭 잡았었다. 아빠의 온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태어나서 아빠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보며 무력했다. 다른 손으로 어깨를 꼭 잡아주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항아리에 담길 정도의 고운 가루가 되신 할머니를 할아버지 곁에 놓아드렸다. 아직도 뜨겁지는 않지만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할머니와의 포옹이 온몸에 남아있는데, 그 추운 겨울날 나는 기온보다도 차가운 항아리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할머니가 떠나고부터 모든 날이 이상했다. 시간이 다른 차원처럼 느리게 흐르고, 난 결코 좋은 손녀가 아니었는데도 그 누구보다 효도했던 손녀처럼 눈물을 쏟았다. 인간의 마지막은 뭘까. 이토록 이질적이고 생경한 며칠이 지나면 남겨진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공허한 일. 모두가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그 일이 성큼 다가왔을 때 무너져 내리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떠나간 이들이 잘 지내고 있을 세계를 상상할 만큼 우리는 진한 그리움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할머니가 떠난 이후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때의 기억이 1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제 일처럼 선명한 걸 보니 상실의 공간은 평생 비어있는 건가보다. 비존재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 자리에 있다. 눈물은 더이상 나지 않아도 공기만 잡히는 텅 빈 자리는 언제나 꿈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