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작품
아크릴 물감은 대학교 1학년, 선선한 가을이 다가올 즈음에 처음 사용해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살아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붓질, 그 느낌을 살리고 싶었었다. 캔버스에 검은색 아크릴 물감으로만 가지고 칠했다. 결과는 꽝이었다. 내가 원한 붓질도 아니었고 색감도 아니었고 구상한 것도 아니었다. 왜일까 고민했다. 유화가 아니라서 그 느낌을 못 살려내는 걸까? 작품을 망쳤다는 생각에,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내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캔버스 살 돈도 없는데 이걸 버리자니 아까웠다. 비록 몇 천 원밖에 안 되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지금 쓰지도 못할 것, 검은색 아크릴 물감으로 다시 평평하게 칠해서 잘 말린 뒤 그 위에 다른 작품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캔버스 위에 다시 곱게 검은색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고 또 칠했다. 그때는 젯소도, 하얀색으로 칠할 생각도, 천을 떼내 새로 붙일 생각도 없었다. 돈도 없고 정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약 반년이 지났다. <나그네는 쉴 곳이 없다-우울할 적에/Suffer>와 <욕망 Desire-모세와 불타는 가시떨기나무> 작품을 완성했다. 그때 8호 캔버스와 같이 산 1호 캔버스 2개에 말이다. 그동안 조금 모아놓은 용돈으로 캔버스를 몇 개 샀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딱해 보였는지 아크릴 물감도 사주신다고 하셨다. 이제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도 있겠다, 어느 캔버스에 무얼 그려볼까 고민되는 순간, 검게만 칠해진 캔버스를 발견하게 됐다. 그것을 보자마자 갑자기 영감이 딱 떠올랐다.
난하다
그 당시의 내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였다. 어디서 배운 단어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음속에 퍼지는 단어였다. 난해하다가 제목이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가졌다.
난해하다 [難解--]
1.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2. 풀거나 해결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난하다는 단어가 더 이끌렸다.
난하다 ¹ [亂--]
: 빛깔이나 글씨, 무늬 따위가 깔끔하지 아니하고 무질서하여 어지럽고 어수선하다.
난하다 ² [難--]
1. 어렵거나 힘들다.
2. [같은 말] 곤란하다(사정이 몹시 딱하고 어렵다).
난하다는 1로 보았을 때도 맞고, 2로 보았을 때도 맞아 들었다. 그 당시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사전으로 '난하다'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배와 관련된 의미만 나왔을 뿐, 내가 생각한 단어가 나오질 않아 실망했었다. 요 근래 다시 사전을 찾아도 그 뜻이 나오지 않을 경우 '난해하다'라는 제목을 정하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내가 원하는 '난하다' 단어를 쓸 수 있게 되었다.
2018년 나는 이작품과 다시 대면을 했다. 내 작품과 대화가 필요했다. 거의 5년을 창고에 두고 방치해두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간 방에 걸어두고 틈틈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 몸이 갑작스럽게 나빠졌었다. 약간의 탈모, 매일 터지는 코피, 알 수 없는 두근거림, 심장이 압박되는 기분, 심한 기침 등이었다. '다시는 미술을 못 할 거야, 아니, 안 할 거야'라는 생각에 완전히 덮어둘까 싶었던 그림을, 미련이 남아 남겨둔 흔적을 통해 그 당시의 감정과 생각들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는 듯했다. 작품을 계속 생각해내고, 작품 설명을 쓰다 보니, 표출해내지 못한 괴로움 때문이었을까. 심장의 두근거림은 사라지고 심장을 압박하는 무언가도 사라졌다. 글을 써 내려가면서 건강은 점점 호전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한 달간 작품과의 대화를 마쳤다. 그렇게 나는 그림과 악연이면서도 인연이고, 필연적인 관계임을 다시 느꼈다. 미우나 고우나, 끊으래야 끊을 수가 없는 단짝 친구를 둔 기분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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