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작품
*종교적인 내용과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거북스럽게 느껴지실 수도 있으니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두 달은 처음으로 완전히 글 쓰는 데만 집중을 해보았다. 2월 말이 되자,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글도 못 쓰는 데다가 아무 결과물도 나오질 않았다. 그 2개월 동안 말이다. 너무나도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해내 보자라는 다짐으로 절실하게 해봤지만, 내 집중력에는 뱃사공이 가득 타고 있어서 그런지 산으로 가버렸고, 산으로 가버린 나의 집중력은 나 자신도 무엇을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차라리 그 아까운 시간들을 고정적으로 아르바이트를 곁들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고, 나는 올해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졌었다.
공모전은 톡소다에 한 번, K-콩쿠르 평면 회화 미술에 한 번, 사랑아트 기독미술에 한 번 참여하게 되었다. 톡소다는 교보문고의 첫 웹소설 사이트였기 때문에 기성 및 신인 작가들도 다 참여가 가능했었고, 장르는 판타지, 무협, 로맨스 등과 같은 계열에서 흥했기 때문에 나는 기대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바위에 계란 던지듯이 해보았지만, 역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보단 좋은 도전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여전히 수필이나 소설의 '끝'은 맺어지지 않았다.
K-콩쿠르 평면 회화 미술에서는 <목이 곧은/뻣뻣한 백성들>로 공모하게 되었지만, 당연히 탈락했다. 설명서에는 출애굽기 32장 1-9절이라고만 적어놓고 당당하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내가 봐도 어처구니없지만, 그들이 보기엔 얼마나 우스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도전이라고만 여겼다.
사랑아트 기독미술에서는 종교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들떠 있었다. 하지만 은둔자에 떠돌이 같은 기독교인인 내가 과연 종교적인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작가 소개서에 신앙에서 턱-하고 막혀버렸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신을 믿지만, 방황하고 있는 나였다. 이러한 모습을 진실히 드러내면 누군가가 알아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올해는 '도전적인 삶'을 우선으로 두었기에 '탈락'에 염두에 두지 말자고 다시 마음을 붙잡았다. 아래는 나의 신앙 고백이나 다름없는 작가 소개서였다.
모태신앙.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대신 신앙을 고백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그 짐.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착하게 행동해야 하며, 무조건 순종적인 자세여야 하며, 어디 하나 치우치지 않고 반항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교회에서 부임받은 신분 혹은 신앙 때문에, 아이들은 한 명 한 명마다 고유의 성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배제당하며 외면당해야 했습니다. 성도들을 비롯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사무엘 같지도 않은 데다, 베드로도 한 성격을 했다는 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나님은 계시다. 머리가 조금 크고 나니 이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저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교회를 다녔지만, 머리가 크고 나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느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실까.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신앙 교육이 머리가 조금 큰 여럿 친구들을 만나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닌, 어릴 적 배움을 통해 얻은 지식이었으니까요.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뿌리가 없었으니까요.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이 없자,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라는 생각에 스스로 자책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항상 “왜”를 붙이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존재할까. 그리고 나는 “왜” 존재할까.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그리고 많은 종교 중 나는 “왜” 개신교일까. 질문은 질문을 만들어내고 명확한 정답은 없었습니다. 이젠 아는 것도 없고, 신앙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시기에 마틴 루터도 자신의 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변했듯이 저에게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은둔자 마냥 교회를 다니는 것을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서 어머니는 성경 통독을 권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성경 통독 1독을 하면 저에게 소정의 용돈을 주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머니와 약속을 함으로써,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까지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오경을 넘어, 시편에 다가왔을 때쯤이었습니다. 항상 어린이들에게 모델이 되던 ‘다윗’이 지은 시편을 읽을 때였습니다. 다윗도 죄를 지었지만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양하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을 읽다 보니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지은 잠언을 읽으면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허무하고, 허무하다.’ 그렇게 훌륭한 솔로몬은 “왜” 허무하고 허무하다고 느꼈을까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고의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었고 부와 명예까지 다 갖춘 사람이 무엇이 부족하기에 허무함을 느꼈을까. 잠언을 쭈욱 읽으면서 “하나님 외에 모든 일이 헛되고 허무하다”였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교회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성도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를 받을 수 있지만, 저에게는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첫걸음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일찍 갈 때마다 들은 설교는 ‘하나님은 누구신가’와 ‘어떤 분이신가’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다. 어떤 분이냐면, ‘친구’ 같은 분이시다. 성경에서는 우연은 없고 ‘필연’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소개해주는 설교마다 늘 ‘친구’ 같은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늘 옆에 계시고, 지켜봐 주시고, 친구처럼 다정하다고. 그때도 이해가 잘 되질 않았습니다. 신이나 되는 존재가 어떻게 한가하게 나 같은 사람이랑 친구가 되어준다는 걸까. 하나님이랑 친구가 된다는 느낌은 무슨 느낌일까. 초등학교 5학년 때 헌금을 걸면서 컴퓨터 고쳐달라는 진심이 담긴 기도 후로, 거의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는 왜 살까요.”
고등학교 2학년 학교를 다니는데 반복적인 삶에 지치고 우울해지던 나머지, 기도의 첫마디였습니다. 6살 때부터 미술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지만, 현실에 부딪혀 할 수 없어 마음으로만 간직을 하다, 그 기도에 다시 한번 마음속에 타올랐습니다. 그림을 그리자. 예술을 하자. 예술 계열을 반대하는 부모님의 눈치가 보여도 마트를 따라갈 때 4B 연필들과 무선 노트를 샀습니다. 집에서 그릴 수 없으면 학교에서라도 틈틈이 그려내자. 다짐을 하고 마트에 따라갔을 때 24색 색연필을 구매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들고 다녔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저는 살아있다는 느낌과 사명을 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는 진학하지 말고 아르바이트나 취업을 통해 미술 자본을 모으려고 했으나 부모님께서는 대학 생활을 경험하는 것도 좋다며 **대학교 기독교교육과를 추천해주셨습니다. 신학대보다 미술대를 더 가고팠던 저는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부모님은 저에게 재능이 없다며 다시 한번 더 좌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에 **대학교 기독교교육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신앙에 비해 믿음이 좋던 다른 학우들을 보고서 또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중, 2학년 때 사촌 동생과 할머니가 떠나자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약 1년간 또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는가. 나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생겨버릴까. 고등학교 2학년 때로 끝날 것만 같던 숙제가 다시 생긴 기분이었습니다. 인생의 숙제만 같았습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10년간 캄보디아 단기 선교를 하던 언니(A)가 저에게 같이 가자고 설득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난 뒤,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은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떠나 어느 깊은 바다 가운데에 빠져있는 것만 같아,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거나 확신을 들 것 같지는 않지만, 기도를 했습니다.
‘갈까요, 말까요.’
아는 것 없고 무식한지라 기도도 무식할 뿐 돌직구로 날려버렸습니다. 무언가 제 가슴에 들어온 응답은 ‘가라’였습니다. 이렇게 순순히 될 리는 없다며 다시 기도를 해보았습니다. 여전하자, 4, 5번에 이어져 계속 기도했습니다. 응답은 여전히 똑같았습니다. 다시 다른 기도를 해보았습니다.
‘하나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더위를 많이 타요. 거기 가면 더위로 죽을 수도 있을 수 있어요. 더우면 어떡하죠?’
응답은 그러한 것을 고민하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떠돌 때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만들어준 신이 나 아니냐며 다시 말하지 않으니 가라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A에게 다시 연락을 주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인원은 저를 포함한 9명이 모였고, 자본으로 고민이 많은 언니도 있고,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힘든 형제도 있고, 몸이 안 좋지만 가고 싶은 형제, 모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세 달 정도 다들 시간을 쪼개어 모이고, 단기 선교를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는 그 당시 우기였지만, 저희가 도착할 때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봉사하는 10일간은 봉사하기 전에는 비가 잠깐 내려 흙먼지가 날리지 않았고, 온도가 잠깐 내려가 다니기가 좋았으며, 하늘에는 구름이 끼여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도 올해는 정말 봉사하기가 좋은 해인 거 같다며 좋아하셨습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일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며 A언니가 대답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약속하신 작은 일인 것 같이 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선교를 같이 간 8명과 그리고 교회 사람들과 그 지인들의 기도가 다 응답을 받은 것 같아 다시 부끄러워졌습니다. 남은 4일은 그 앞과는 다르게 너무 피곤했습니다. 다행히도 4일간은 캄보디아의 유명 여행지를 도는 곳이라 긴장도 풀려 차 안에 내내 자거나 숙소에 들어가서도 내내 잤습니다. 그 4일간은 햇살이 매우 강렬해서 같이 간 언니들이 너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이 없냐며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는 일이라 모르겠으며, 앞 10일에 날씨가 좋음에 만족을 하고, 햇살이 좋으면 사진 찍기는 좋다고 말을 하자, 언니는 그렇다며 수긍을 하고 남은 여행을 마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캄보디아 선교는 저에게 하나님이 계시며, 저의 작은 기도에도 응답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 하나님을 굳게 믿는 사람들 앞에 한도 없이 작아지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작은 저에게도 하나님을 알게 해주심에 너무 감사드렸습니다. 캄보디아 선교를 다녀왔을 때는 ‘진정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고,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워낙에 간사한지라 뒤돌아보면 잊어버리고 떠나기 쉽다는 사실을 저는 스스로 간과해버렸습니다. 매일 12시가 되면 초기화가 되듯이, 신앙도 매일매일 갈고닦아야 하는 것인데, 한 두 번의 경험으로 ‘나는 신을 알며, 나는 굉장히 큰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라며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아시고 낮추시기도 하지만, 살아있을 때가 아닌 죽고 난 뒤 자신이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란 것을 알려주시고, 교만한 저를 낮추시게 하시고 교만과 겸손의 그 가운데를 없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신교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고 일부러 그런다 등과 같은 인식을 가지거나 말을 하고 다니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신앙고백이 다른 사람을 전도할 때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하는 곳에서든지 교생 실습을 갔을 때든지 SNS상에서든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지 죄를 짓지 않는 한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말만 하지 않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는 제가 되려고 말입니다. 또한 저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전도를 해야 하는데 요한은 강력하게 욕(?)을 하며 사람들을 전도했지만, 저는 작품으로 부드럽게, 은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졌습니다.
종이 위에 그린 <목이 곧은 백성들> 에스키스는 2013년 10월 30일에 시작해서 2014년 7월 8일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작은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이지만, 나는 스케치 단계 전부터 계속 생각만 가했다. 이 그림을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은 걸까? 이런 방식이면 전달이 잘 될까? 이 작품을 만일 캔버스에 옮겼을 때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될까? 이 작품을 언제쯤 캔버스로 옮길 수 있게 될까? 등과 같은 질문이 나에게 퍼부어졌다. 일단 '나도 모르겠다'였다. 이 작품을 완성하고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작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심오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가 의문이었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공모전을 유심히 찾아보다가 눈에 들어온 공모전 2개. 두 공모전 다 50호로도 참여가 가능했고, 참여 기간도 다르고 발표 날짜도 달랐다. 50호 캔버스를 사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그에 들어가는 재료들도 만만치 않았다. 작품이 너무나도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띄우고 있었기에 두 개의 어느 것을 참여하더라도 떨어질 것이 눈에 선히 보였기에 참여했었다.
2017년 3월부터 시작해서 6월에 캔버스를 주문하고 방학 중에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고 난 후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었다. 9월부터는 다시 또 일을 시작하는 바람에, 10월이 다 되어서야 작품이 캔버스에 올라오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하기에 시간의 촉박함도 있었으나 내가 원하는 작품의 이미지가 나와서 조금은 뿌듯했었다. 이제 작품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줄 작품 설명을 적을 차례였다.
출애굽기 32장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들이로다
내가 인용한 성경 구절 부분이었다. 성경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갔을 때 아론에게 눈에 보이는 신,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 금고리를 거두어 송아지 형상을 만든다. 그러고 아론은 이것이 신이라고 하며, 단을 쌓고, 이튿날에는 백성들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기뻐하고 안심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간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다는 것을 듣고 내려왔으나 이미 상황은 끝나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목이 뻣뻣한/곧은 백성들’이라고 했다.
무척이나 건방져 보이지만, 질문을 던지고 싶었었다. 무엇이 먼저 눈에 보이는가? 배경의 황토색인가? 아니면 앞의 네 기둥들? 아니면 빨갛고 긴 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밝아 보이는가? 아니면 밝아 보이면서도 뭔가 찝찝한 면이 있는가? 아니면 어두워 보이는가?
먼저 설명하고픈 부분은 황토색이었다. 사람의 피부색과 가깝기도 하지만, 모래(흙)의 색과도 비슷하며, 황금과도 색이 비슷하다. 그만큼 황토색은 다양한 곳에 쓰이기도 한다. 가까이서 보게 된다면, 붓질이 매우 촘촘하게 뾰족하게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하기도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나온 ‘금고리’를 말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은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중략)’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흙’도 포함이 된다.
그다음으로는 앞의 네 기둥이다. 이 네 기둥은 큰 의미로는 사람을 표현했다. 네 개만 그려진 이유는, 시각적으로 안정적이게 보이기 위함과 크코 작음(키)을 한눈에 보이기 위해서도 있었다. 색을 두 가지로만 쓴 것은 또 다른 피부색과 나이를 표현하기 위해 정했었다. 나이가 많은 노인은 염색체가 점점 사라져 하얀 반점들이 생겨날 수도 있지만, 보통 주름들과 기미들, 검버섯들 등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또한, 밝은 갈색에서 진한 고동색으로 작고 크고를 표현함은 나이가 들을수록 삶의 지혜가 깊어짐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가늘고 긴 빨간 선은 목이 곧은/뻣뻣한 백성들의 목이 꺾임을 의미한다. 즉, 죽음을 뜻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32장 26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게 되었다.
출애굽기 32장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 성경 구절에서는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하였더니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에게 갔고, 하나님은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라고 하자, 레위 자손은 그 말대로 행하여 이날 백성 중 3천 명 가량 죽임을 당하게 된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사람에게 개입하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은 너무 가혹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눈이 뒤집어져서 복수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그 사람을 해치려고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배신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수심에 불타오르기도 한다. 이 외에도 부모가 자식이 망나니가 되면 자책하기도 하고 탓하기도 한다. “내가 널 힘들게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 면서 말이다.
창조과학 입장(기독교)에서는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이다. 위의 예시를 앞 성경 구절에 빗대어 말하자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행하며,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고, 기뻐하며 안심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이 과연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며 선처하여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사람은 사람이 잘못을 하게 되면 훈육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행동이 하나의 사랑의 표현일 수도 있다. 만약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관심이란 또 다른 하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도 사람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에 탕자가 되더라도 꼭 되돌아오길 바라며, 타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지금 현실에 더 좋은 것에 맺혀 무시하고 귀담아듣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여도 경외하지도 않고, 다른 신이나 돈, 현실에 만족하고 지금의 우리는 안전하고 평안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며 다른 것들은 이상하고 우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믿고 따르는 신들은 항상 자기들에게 올바르고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어야만 한다고 한다.
사람은 현실에서 부와 명예, 그리고 항상 좋은 일이 있어야만 잘 산다고 생각한다. 삶에 좋은 일이 100%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한 삶일까? 사람은 70%의 안 좋은 일과 불행, 30%의 기쁜 일과 행운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고난과 고통을 겪고 이겨나야 그것에서 빠져나옴으로써 행복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더라도 나 자신이 성장이 되려면 고난을 겪고 한층 더 성장해나가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몇 백 년 동안 애굽의 노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잊어버렸다. 나 자신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심을 잊고, 지금의 일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불평을 하지 않는가? 혹 하나님을 떠나, 예수님을 외면하고 현실에 만족하지는 않는가?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매하게 굴고 있지는 않을까? 꼭 황금 송아지만이 우상이라고만 취급하고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라며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렇게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라는 경각심을 위해 그리게 되었고 드디어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곤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목이 곧은/뻣뻣한 백성이 아닌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은 무단 도용 금지입니다. 작품/사진을 무단 도용할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