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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닐 May 24. 2019

살아있는 도시, 베를린에서의 필름

예술과 순수가 전부인 곳에서 자아찾기


 지난 달(11월) 나는 따지자면 생전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이름부터 웅장한 베를린으로.

독일에 와 생활한지 4개월이 다 되어 갈 쯔음이였다. 졸업을 하자마자 어딘가로 다시 뜨면 뭐라도 남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오게 된 독일이었다. 미국이 그리웠지만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독일로의 인턴경험을 하러 왔다. 건설적인 목표는 없었다. 그저 낯선 경험에 나를 내던져보고 싶었던게 가장 큰 이유였다. 


 미술을 해왔고 어쨋거나 예술로 생을 꾸리고 싶은 생각이 (아직도) 전부인 나는 프랑크푸르트의 삶이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처음 몇 달은 정신없이 즐겁게만 지나간다. 그 쯤에는 정말 근 몇년 중에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고 긍정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생활에 적응할수록 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집도 좋고 사람들도 좋은데, 내가 일상속에서 하는 일이 나는 사랑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게 아무래도 중요했다. 



 그냥 살아도 한 치 앞도 모를 인생인데 한국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해버린 나는 어쩌면 항상 목적지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게 뭔지도 알고 잘하는게 뭔지도 아는데 언젠가부터 그저 둥둥 발 밑에서 넘실거리는 공기에 나를 맡기고 부유하는 게 다 인것 같았다. 

 대학 졸업을 앞두면 누구나 초조해지기 마련이라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번듯한 직업을 갖게되고 다른이들의 선망을 사는것을 보는 게 잦아지면, 나는 소리없이 눈치를 보았다. 길이 나있는 방향이 아닌, 길을 혼자, 그것도 꽤 유니크하게 개척해야하는게 숙명인 예비예술학도라 더욱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가 낯선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정착하고 살아가면서 혼란스웠던 것일 게다. 일단 이 나라로 몸을 던지긴 했는데, 그 다음으로는? 어떤 길로 내던져야 하는 것일까. 생각이 많아질 수록 시야는 희뿌옇게 된다. 


그래서 갔다. 베를린으로 가자, 그냥 그 시점에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베를린에서 영화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갖게된 이후였고, 마침 새 필름카메라도 생겼겠다. 

베를린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적지 않은 도시를 가봤다. 이상적으로는 런던이 좋았지만 그래도 1년에서의 시간은 무시 할 게 아닌지 여전히 뉴욕을 사랑하고 있었다. 로망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그 도시가 가진 대체불가한 서사와 에너지, 익숙해서 생긴 노스텔지어 비슷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 도착하고 하루도 안되서 나는 이 도시가 주는 황홀경에 휩싸여있었다. 매 순간 놀라울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특별히 아름다운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화스러운 도시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또 없는 곳임은 분명했다. 






 장렬한 역사의 순간이 남아있는 곳이라 그런지, 이 곳의 분위기가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 넘쳐나고 사람들도 넘쳐난다. 날씨는 훨씬 쌀쌀했는데 이상하게 프랑크푸르트에 있었을 때 보다 따뜻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도시를 활보하는 사람들과 오래된 자전거둘, 덕지 덕지 붙어있는 공사장 주변 포스터들, 낡은 판자위의 셀 수 없는 그래피티들 하나 하나에 생명력이 가득했다. 겨울인데 봄인 것 처럼 모든게 태동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숨겨 왔어야 했던 젊은 순수가 사방으로 해방되고 분출되는 도시라고 하면 될까, 내가 느낀 베를린의 이미지는 그랬다. 이 도시와 도시의 사람들이 주는 유연하면서도 강렬한 그 무언가가 이 도시의 온 공기마다 베어있는 것 같았다. 


 정돈되지 않은 것, 정돈 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시각이 다시 눈 뜨게 만든다. 탑 클래스의 세련된 무언가가 아닌 다소 직설적이고 투박하다. 그리고 진하다. 저마다의 향이 뚜렷하면서도 서로 섞여있고 그렇지만 어디에도 휩쓸릴 생각은 않는다. 

그와 동시에 행복하다. 다른 것을 좇지 않고 자기의 여유와 예술을 충만하게 이어나가며 그것에 대해 행복해하는 베를리너들. 난잡해 보이지만 사실 그 어디보다 충만한 예술들의 활주.


베를린은 그것이 전부다.




어느 거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에 영화미술에 관한 도서를 좀 얻고싶어서 들린 서점이 있었다. 길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숨겨진 곳이라 안에 들어서면 바깥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엘피 플레이어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카운터의 직원은 손님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이 곳이 가게가 아닌, '아무나 와서 우리 공간의 흥미로운 책들 좀 구경하세요' 하는 문화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찬찬히 둘러보니 오래된 목재 테이블들 위에 자유분방하게 쌓여있던 책들은 일반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장르는 아니었다. 대부분이 다양하고 실험적인 소재를 가진 독립출판이었다. 작은 예술서점답게 영어로 된 책은 거의 없었다. 한적한 구경을 마친 뒤, 독일어를 더 잘하게 되면 다시 와야겠다 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특별한 걸 하진 않았지만 그냥 이상하게 문득 이 곳이 다시 궁금해진다. 잘 있나 싶고. 




 베를린에서의 나흘 남짓한 시간이 나에게 남긴 것은 분명히 있다. 내 안의 많은 잡념들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꿈꾸는 그 어떤 것을 더 이상 해치게 두지 않겠다는 것과, 분명한 신념이라면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이라는 여유다. 나는 가끔 욕심만 앞서느라 행동하지 않는다. 마음이 조급해져버려서 지름길로 가려고 하다가 결국 그 사이에서 나에게 꼭 필요했던 아름다운 것을 다 놓치고는 한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당장 나에게 코앞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많은 문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잠겨있지는 않은데, 그래도 열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이 당연한 사실에 나는 부담을 가져왔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들어 느끼는 건 내가 천천히 다가간다고 해서 그 문들이 어딘가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 조급하게 문을 열다가는 문고리가 덜컥 고장날 수도 있는 법이다. 천천히 한 걸음도 빼먹지 말고 걸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의심하지 않고 한 발짝이라도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내딛다 보면 결국엔 나를 맞이해 줄 문이 내 앞에 와 있을 거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이상과 신념, 그것에 다다르기 위한 수 많은 갈래들. 그것들보다도 그 갈래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더 돌보는 마음이 나에게 가장 크게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되었다. 이제 그 행선지들에 대한 압박을 좀 내려놓고 그저 그 곳으로 향하는 나만의 드라이브를 맘껏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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