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다린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부정(否定)의 말들이 주문처럼 꼬리를 물며 되풀이된다. 도둑고양이처럼 어둠 속에 움츠러든 나는, 노오란 눈으로 밤의 적막을 찢어내듯 노려본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또다시, 저주 같은 말들이 독화살이 되어 내 가슴을 뚫고 든다.
우리 집 거실 한쪽, 도코노마의 격조 높은 벽감 속이 내 은신처다. 내 등 뒤로 수십 년 된 일필휘지의 원상(圓相)이 무심하게 걸려 있는 가운데, 나는 두 개의 문을 감시한다. 왼편의 아들 방으로 이어지는 문과, 오른편의 아내 방으로 통하는 복도 끝 장지문을.
오늘도 변함없이 아들은 식탁 위 약통에서 아내의 우울증 약을 꺼내 물잔과 함께 쟁반에 담았다. 내 눈의 착각이었을까. 복도를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고, 장지문을 열고 쟁반을 건네는 손길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웠다. 아내의 방 안에서 새어나오던 불빛은 장지문 틈새로 가늘게 아른거리다가 마침내 어둠 속에 잠겼다.
시계의 초침은 마치 내 심장 박동처럼 느리게, 그러나 가차 없이 두 바퀴를 돌았다. 이제 아들의 방에서도 스탠드 불빛이 사라졌다. 수험생의 책상 위엔 여전히 문제집이 흐트러져 있을 것이고, 피곤에 절어 침대에 쓰러진 아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졌을 터다.
하지만, 나는 기다린다.
아들이 깨어나기를, 다시 그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를. 저 미닫이문이 가느다랗게 삐걱이며 열리기를. 그가 발끝으로 어둠을 헤치듯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기를. 낡은 마루가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낮고 끔찍한 신음을 내기를. 그리고 마침내, 어둠과 하나 된 그의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기를. 아내의 방으로, 그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그래, 그렇다. 그런 일이다.
이 집의 가장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인 나는 지금 자식과 아내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마치 간통 현장을 잡기 직전인 사내처럼, 나는 의심과 확신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다. 희열과 배신감이 동시에 내 가슴을 쥐어짜듯 휘감는다.
맞아. 맞을 거야. 그럴 수밖에.
완벽한 깨달음의 원이 나의 불경함을 비웃으며 부유하는 동안, 예언 같은 말들이 내 안에서 끝없이 돈다.
맞아. 맞을 거야. 그럴 수밖에.
나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가 아들의 교복 재킷을 여미던 그 따스한 손길과, 엄마의 손을 잡고 걷던 아들의 느릿한 발걸음에서 순수한 모자의 정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비도 지아비도 뭣도 아니다. 두 사람의 목덜미를 낚아채려는 독사다. 그저 똬리를 틀고 기다릴 뿐이다.
의심의 밤은 기나길고 나의 은신과 감시는 지옥처럼 끝이 없다. 그 탓에 나는 악몽의 시작점을 찾아 헤맨다. 마치 패배한 바둑을 복기하듯, 뼈아픈 심정으로 모든 불행의 첫 수를 헤아린다. 그래, 내 평생 가장 형편없는 대국이 우리 가족이다. 잘못 둔 돌들, 무너진 집, 영원히 놓쳐버린 기회들이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칫솔을 내려놓는다. 욕실의 칫솔은 셋이다. 말없이 가지런하다. 아침에는 늘 그렇다.
구두를 구겨 신는다. 두 켤레가 남는다. 먼지가 내려앉는다. 기다림만큼 무겁다.
내 신발이 말없이 돌아오면, 다시, 온전한 셋이 된다.
발걸음 하나. 장지문의 그림자 둘. 고독이 방문 앞을 서성인다. 이 시간이면 늘 그렇다.
늦어서 미안해. 내 그림자도 못 듣는 말, 누구도 대꾸하지 않는다.
침실의 빈자리에 일을 펼친다. 아내 대신 종이를 끌어안는다.
지우개로 지운다. 연필을 깎는다. 박박. 사각사각. 그마저 사라진다.
마침내 고독이 베개를 눕는다. 평소보다 이르다. 끌어안을 것이 없는 탓이다.
더 많은 종이가, 지우개가, 연필이, 더 많은 소리가 필요하다.
쪼르르르.
욕실에 서서 오줌을 누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노란 오줌 줄기가 힘없이 갈라져 하얀 도자기 변기 가장자리를 엉뚱하게 적셨다. 수도꼭지를 덜 잠가놓은 것처럼 시원찮은 것이 영 마뜩잖았다. 나는 축 처진 살덩이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정신 좀 차리라고. 손가락으로 탁탁 때리며 구박했다. 남편 구실조차 못하는 게.
녀석은 기회조차 없는 걸 어쩌냐며 억울해하겠지만, 이 몸뚱이도 제법 억울했다. 아내가 방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아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슬리퍼가 마루를 긁는 소리. 언제나처럼 이 시간, 그 방향. 아내의 굳게 닫힌 방문을 향해 가는 발걸음 소리였다.
우울증에 빠진 아내는 남편은 거부해도 아들에게만은 문을 열어주었다. 매일 아침 그 방에 들어가 땀 밴 이불을 정리해 주는 아들이었다. 아내는 아들의 손끝에서만 약을 받아 삼켰다.
'아내는 아내 도리를 못 해도, 아들은 아들 도리를 하니 그나마...'
현관문 앞에서 혼잣말을 멈추었다. 문득 마지막으로 용돈을 준 날이 가물거렸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이따금 건네주던 봉투. "엄마 돌보느라 고생하니까." 하면 아들은 으레 한두 번 사양하다 받아 들곤 했었다.
사무소 책상에 앉아 포켓 노트를 펼쳤다. 아들 용돈 - 7월 15일, 가정부 월급 - 8월 1일. 아들 용돈을 준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잠시 망설이다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배뇨 상태 - 8월 23일'. 오전, 소변 줄기 약함, 특이 사항 없음. 어느새 마흔다섯. 전립선이 말썽을 부려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였다. 며칠 더 지켜보다 이상이 있으면 비뇨기과를 찾을 생각이었다.
장시간 앉아 있는 습관, 끊어진 아내와의 관계, 매일의 흡연. 전립선 염증이나 비대증을 떠올리며 나쁜 습관들을 곱씹었다. 오전 내내 일이 손이 잡히지 않았다. 휴게실에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또 다짐했다. 이번엔 꼭 끊어야지.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탔다. 뜨거운 물에 섞인 커피 가루가 떠오르며 싸구려 향이 코끝을 찔렀다.
복사실에서 박 양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현장 감리와 통화하며 울리는 웃음. 지난주 회식에서도 저랬지. 소주 두 잔에 볼이 달아오르더니 목소리가 요란해졌었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저 입술은 침실에서도 저렇게 시끄러울까. 술자리에서 테이블 아래로 스친 그녀의 다리.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한 접촉이 머릿속을 맴돈다. 저 웃음소리처럼 끈질기게.
종이컵을 이빨로 꾹꾹 질겅거렸다. 끄트머리에 검은 입술 자국과 젖은 이빨 자국이 남았다. 내 입술에도 묻었을까. 혀끝으로 훔치듯 닦아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비우고 담배꽁초를 담았다.
오후에는 도쿄대 후배 정군이 찾아왔다. 서른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앳된 얼굴에 깔끔한 뿔테 안경,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일본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건축 사무소 개업과 팀 구성에 관한 조언을 구하러 온 그는 내게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형수님과 함께 드세요."
일본 백화점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여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쿄에서만 살 수 있는, 그 과자였다. 유학 시절, 일본인 아내와 단둘이 앉아 나누어 먹던 그것.
"고마워."
목소리가 갈라졌다.
"집사람이랑 잘 먹을게."
상자를 책상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하필 이런 걸 사 왔나. 수년째 아내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멍하니 서성이다 돌아서기만 하는 내가, 그녀와 이 과자를 나눌 수 있을 리 없었다.
오전엔 전립선 걱정이, 오후엔 책상 구석의 찌그러진 과자 상자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설계 도면을 펼치고, 인허가 절차를 살피는데도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흘렀다. 결국 구겨진 상자를 서류 가방에 쑤셔 넣었다.
마침, 박 양이 퇴근하려는 듯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공 현장 점검으로 다른 팀원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엔 우리 둘뿐이었다. 내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지금 퇴근해?"
“예, 오늘 일은 다 끝냈어요."
마치 내가 퇴근을 책망이라도 할 것처럼,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머리를 낮게 묶은 그녀가 굽이 낮은 펌프스를 신은 채 서 있었다. 연보라색 블라우스 아래로 슬립이 비칠 듯 얇다. 시계를 확인하는 시늉을 하며 말을 꺼냈다.
"태워다 줄까?"
가방끈을 매만지는 손끝에 망설임이 역력했다.
"터미널 근처까지 가는데요?"
"같은 방향이야."
문득 생각났다. 청년 시절의 나는 꽤나 인기가 있었다. 지금도 그럴까.
서류 가방을 뒷좌석에 던지고 박 양이 조수석에 타는 걸 지켜봤다.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은 싸구려 시나리오를 그렸다. 집 앞에 내려주고, 차 안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위층으로 이어지는 그런 뻔한 이야기를.
유부남과 단둘이 차를 탄다는 건, 어쩌면 그녀도 그런 생각이 있지 않을까. 적당한 구실만 찾으면 될 것도 같았다. 그동안 박 양은 라디오만 들었다. 이문세의 낮은 목소리로 '옛사랑'이 흘러나왔다.
"저 앞에서 내려주세요."
예상과 달리 도로변에서 내렸다. 덕분에 편히 왔다며 꾸벅 인사하는 그녀의 미소가 차창 밖에서 빛났다. 주름 하나 없이 밝고 어린 얼굴. 그저 아무 생각 없는 걸까.
"내일 봐."
빙긋 웃어 보였다. 핸들을 움켜쥔 손마디가 하얗게 돋았다. 박 양이 사라지자, 후방 미러에 비치는 뒷좌석 가방이 자꾸 눈에 걸렸다. 그 안의 과자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야속하다. 그녀가 야속하다. 참으로 야속하다.
스무 살에 만난 그녀가 내 처음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처음이 되어주었고, 그렇게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런 내게 어찌 이토록 야박하게 등을 돌릴 수 있는가.
하룻밤 사이 남편을 타인으로 만드는 아내의 침묵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배웠다. 그것은 분노나 배신감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이었다. 좁은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그녀는 유령처럼 스쳐 지나갔다. 더는 시선도, 말도 없었다. 그 적막 속에서 단단했던 일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십 년 가까운 결혼 생활 동안, 나는 그녀와 화해하는 법을 몰랐다. 사소한 말다툼에 아내가 잠자리를 피하면, 나는 자존심 상해 며칠씩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깊은 밤, 이불 속에서 아내는 작은 동물처럼 내 품으로 기어들었다. 허벅지를 더듬는 손길에는 언제나 애처로운 구걸 같은 것이 묻어났다. 관계를 가진 후에야 마음이 풀려 그녀를 안아주었다. 우리의 화해는 늘 그렇게 말없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내가 다시는 침실로 돌아오지 않자 우리는 영영 화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희미하게 밝혀진 복도. 아내의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장지문에 비친 그녀의 희미한 그림자를 노려보다가, 방문 앞을 서성이다가, 끝내 내 침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종이를 펼치고, 지우개로 지우고, 연필을 깎았다. 박박. 사각사각. 공연히 썼던 것을 지우고, 이미 날카로운 연필을 또 깎았다.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가방 속 일본 과자가 자꾸만 아내를 떠올리게 했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것을. 아니, 그냥 박 양에게 줄 것을. 나는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먹어 치워버리자. 그럼, 전부 끝이다. 대체 뭘 이렇게 고민하나. 바보처럼. 그저 과자일 뿐인데.
가방에서 상자를 꺼냈다. 흰색 바탕에 금색 테두리가 들어간 직사각형 상자. 은박지에 반듯하게 싸인 과자들. 하나를 집어 들자, 포장지가 반짝였다. 조심스레 뜯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첫입을 베어 물었다. 쌉쌀한 녹차 향이 코끝을 스쳤다. 벚꽃 빛 크림이 손끝에 묻어났다.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감촉이 그날과 똑같았다.
일본 유학생 시절,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일본인 건축가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의 딸이 숙제를 풀지 못해 끙끙대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수학 문제 풀이를 한두 번 도와준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퍽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녀가 금색 리본이 달린 하얀 상자를 들고 내 방을 찾아왔으니.
"손님께 드렸다고 하면 혼나지 않으니까, 같이 먹어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너의 아버지는 나를 손님으로 여길 리 없는데. 나는 마지못해 받아들인 식객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그녀는 그런 속사정도 모른 채 순수한 미소만 지었다. 손바닥만 한 과자를 반으로 나눠 먹었다. 그녀는 이제 우리는 공범이라며 키득거렸다.
과자를 한입씩 베어 물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호기심 어린 눈빛, 새침한 목소리, 작고 동그란 얼굴, 은은히 빛나던 피부, 쇄골을 스치던 까만 머리칼, 그리고 그녀만의 달큰한 향기까지. 모든 것이 선명했다.
은박지를 구기며 손끝이 떨렸다. 나는, 형편없이 흩어지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무너져 내렸다. 고작 과자 하나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수 있나.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달콤함이 목구멍을 메웠다.
아내도 기억할까. 금색 리본과 하얀 상자를 보여주면 떠올려줄까. 처음으로 나눠 먹었던 그 맛을. 처음으로 서로에게 웃어주었던 그 순간을. 어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우리를.
벌떡 일어나 과자 상자를 쥔 채 무작정 아내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는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장지문을 살그머니 밀어열자 아내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깊이 잠든 듯했다. 적막이 숨을 조여오는 가운데, 발끝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곁에 털썩 주저앉아 과자를 내려놓았다.
돌아갈까... 기다릴까... 기다리면 일어날까.
달빛 속에서 아내의 작은 체구가 어스름이 보였다. 홑이불 아래 여성스러운 윤곽이 드러났다. 고른 숨결에 가슴이 물결처럼 오르내렸다.
그래,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자. 그렇게 마음먹고, 그녀의 곁에 살며시 몸을 뉘였다. 머리칼에 얼굴을 묻자 닿은 머릿결이 부드러웠다.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깨끗한 꽃내음이 났다.
한동안 그렇게 냄새를 맡고 있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얇은 천 너머로 허벅지가 손끝에 감겼다. 잠든 아내는 미동도 없었다. 이래도 될까 싶었지만,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잠깐, 아주 잠시만. 아직은 괜찮겠지, 깊이 잠들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그녀를 더듬다가 바지춤 속으로 손을 넣었다. 달빛에 비친 아내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린 시절의 그녀를 떠올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스스로도 비참했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숨결이 뜨거워질 때쯤, 아내가 눈을 떴다. 천천히 올라가는 눈꺼풀.
시선이 마주쳤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았다. 말을 잃은 채 그저 눈만 휘둥그레 뜬 그 순간, 아내가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내 허벅지를 조심스레 더듬었다.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그녀의 손길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심장이 쿵쿵 뛰며 귓가를 울렸다. 그것은 분명 신호였다. 우리가 수없이 해오던 그 화해의 손짓이었다.
나는 이불을 젖혔다. 허둥대는 손길로 아내의 실크 파자마 단추를 더듬었다. 그녀는 순순히 몸을 들어 올려 옷을 벗어주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살결이 창백했다. 몸이 맞닿자,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귓가에 그녀의 숨결이 닿았다. 허리를 감싸오는 손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건 수년만이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솟구쳤다.
그녀의 은밀한 곳들을 어루만졌다. 한때 익숙했던,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그곳들을. 식은땀 밴 손길로 매만졌다. 마치 스무 살 청년처럼 서툴게, 첫날처럼 조심스레.
조급하지 않게 시간을 들여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잠시 눈을 감고 그 따스함에 몸을 맡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아내의 체온이 그립고도 낯설었다. 그녀의 가녀린 팔이 내 등을 감쌌다.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움직임 후, 처음의 감격과 흥분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무언가 달랐다. 익숙했던 그 감촉이 아니었다. 예전과는 다른, 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이 스쳤다. 우리는 수년 동안 관계가 없었는데.
팔월, 매미가 몸통을 떤다. 십칠 년의 어둠을 뚫고 맴맴 운다. 짝을 찾아, 목이 터져라, 혼이 빠져라 운다.
장지문 안에서는 적막이 운다. 젖은 이불이, 묵은 땀이, 씻지 않은 살갗이 늪을 이룬다.
나는 떨며 지나친다. 혹여 절망이 묻을까. 부패가 옮을까. 부르르 몸통을 떤다. 박박 긁는다. 벅벅 씻는다.
적막이 요란해진다. 늪이 끈적해진다. 후두둑, 매미가 떨어진다. 울다 지쳐 죽었다.
나는 검은 몸통을 움켜쥔다. 빠르게 진동한다. 치르르르. 짝은 오지 않는다.
나는 두툼한 그것을 손으로 감싸 쥔다. 그거 하나 안고 잔다.
그녀에게는 그마저도 없는데. 텅 빈 손은 허공을 움켜쥐고 있을까.
퇴근길 박 양을 터미널 앞 도로변까지 데려다준 게 두 번째였다. 그녀가 차에서 내려 사라지는 골목을 백미러로 슬쩍 확인했다. 이십 대 중반의 독신 여성, 이 친절한 배려가 몇 번 더 이어지면 자연스레 그녀의 집 안으로 이어지리라. 그런 계산을 하며 여유롭게 핸들을 돌렸다.
전자레인지 불빛만이 반짝이는 부엌에 섰다. 가정부가 남긴 반찬통들이 도열해 있었다. 밥 1분, 국 2분. 식사 준비는 고작 3분이면 끝났다. 숟가락을 들 때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퍽퍽한 밥알, 슴슴한 국물. 가정부의 솜씨와는 무관했다. 이렇게 인스턴트식으로 준비된 음식이 맛있을 리 없었다. 문득 아내와 마주 앉아 먹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스한 식사가 떠올랐지만, 그 맛은 이미 혀끝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내는 처음엔 장보기를 건너뛰더니 어느새 설거지 통엔 곰팡이가 피어났다. 컵라면 용기가 싱크대를 점령해 갔다. 냉장고를 열면 흰 곰팡이 핀 반찬통들이 시신처럼 늘어서 있었고, 욕실 하수구에선 썩은 악취가 올라왔다.
결정타는 주방 싱크대였다. 어느 아침, 배수구 위로 흰 구더기들이 기어 나왔다. 결국 일주일에 세 번, 가정부를 불렀다. 가정부가 오는 날이면 다시마 국물과 구운 연어 향이 가득했다. 제철 식재료를 사용한 도쿄식 상차림, 노란 프리지어로 장식한 거실과 복도. 아내가 좋아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 정성이 무색하게 아내의 방문은 더욱 굳게 닫혔다.
절반이나 남은 밥그릇을 쓰레기통에 털어 넣고 서재로 향했다. 지난밤 아내와 엉겁결에 밤을 보낸 이후로 서재는 내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아내가 욕실을 쓰러 나올 때면 우연인 척 마주칠 생각이었다.
그때는 서툴렀다. 어딘가 낯선 기분이 들어 결국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고, 아내도 숨만 색색거리더니 금방 다시 곯아떨어져 잠들었다.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이제 도둑처럼 몰래 들어가진 않기로 했다. 하지만 작은 희망은 남아있다. 어쩌면 우리는, 어쩌면….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계가 두어 바퀴 반을 돌았다. 안경을 벗자, 도면에 시달린 눈이 욱신거렸다. 복도의 움직임을 감지하려 곤두선 귀는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때였다. 희미한 발소리 하나. 급히 나와 복도를 살피니 한 실루엣이 검은 물속을 헤엄치듯 미끄러져 걸어갔다. 아내...? 순간 심장이 멎었다. 아니, 남자의 그림자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발끝으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였지만, 오래된 마룻바닥은 낮고 긴 신음을 토해냈다.
나는 아내의 방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장지문에 짙게 내려앉은 그림자 하나. 남자의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지더니, 문이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넓은 어깨, 곧은 등. 시선이 마주쳤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 아들이었다.
"주무시고 계세요."
차가운 속삭임 한 마디.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아들은 문을 등지고 섰다.
"약 드시고 이제 잠드셨어요."
억눌린 목소리 속 초조함이 어둠을 타고 새어 나왔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아들의 굳은 얼굴에서, 그가 막아선 문으로. 이 한밤중의 대치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은 왜 이러는 걸까.
"깨우려는 게 아니야."
퉁명한 한마디에 아들의 시선이 바닥으로 꺾였다. 못 박힌 듯 선 자리에서, 그는 입술을 열었다 다물었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키는 모양새였다.
어릴 적부터의 버릇이었다. 분하거나 억울할 때의 그 습관. '반쪽발'이란 아이들의 잔인한 놀림에도 입술만 파르르 떨다 삼켰던 말처럼. 이제는 나와 키가 비슷해진 아들. 각진 어깨도, 튀어나온 목울대도, 날카로운 턱도 무색하게, 여전했다. 나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자러 가봐."
내가 한 걸음 다가서자, 아들은 잠시 굳어있었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을 억지로 돌리는 동안, 그의 악다문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의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사그라졌고, 발소리만이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자 희미한 달빛 속에 아내의 윤곽이 떠올랐다. 이불 아래로 고른 숨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아들의 말처럼 깊이 잠든 듯했다. 나는 소리 없이 물러났다.
복도를 걸으며 아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아내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로부터? 나로부터?
혀를 찼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하얗게 질린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진 일본 과자들이 내 방문을 고해바쳤으리라. 그날 밤의 일도.
허나 나는 남편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너는 그녀의 방문을 지키고 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