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오후는 더디다. 일본 과자가 땀에 젖어 든다. 아내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쇠사슬 소리. 그네가 운다. 아들은 몸을 던진다. 조그만 심장이 하늘을 향해 뛴다. 높이 날고 싶다고, 멀리 가고 싶다고, 이 마을을 벗어나고 싶다고.
쇳소리. 아-뇨하세요 아-뇨하세요. 아이들이 모여든다. 아들은 웅크린다.
그의 작은 발끝에, 가을 햇살이 고인다. 웃음소리가 스친다. 돌멩이가 날아든다. 커진다. 날카로워진다.
마침내, 아내는 알았다, '반쪽발’의 의미를.
축축한 과자 상자는 영영 사라졌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웃는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서. 잡초 무성한 언덕에서. 먼지 날리는 공터에서. 반쪽 발자국을 따라가며 웃는다.
그네가 울음을 터뜨린다. 쇠사슬을 끌고 하늘로 날아간다. 마을의 오후는 더디다.
오전 6시 40분, 소변을 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또 하나의 기록이다. 일주일째 이어온 배뇨 일지, 하루 여섯 번에서 여덟 번의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이제는 시간, 양은 물론 마신 물의 양과 카페인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처음엔 대충 느낌만 적었던 것이, 어느새 체계성을 갖추면서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 안에서 발견하는 미세한 리듬들이 내 하루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었다. 좋아, 이대로 한 주만 더 지켜볼까.
슥슥— 아들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아내의 방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닫고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저 녀석, 도대체 몇 년째인가…. 아내를 돌보는 일이 지치지도 않나.
사무실에서 소변 일지를 정리하며 펜으로 노트를 툭툭 건드렸다. 며칠 전부터 거슬렸다. 나를 외간 남자 보듯 쳐다보던 아들의 얼굴, 아내의 방 앞을 지키고 선 그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 아들과 아내는 늘 각별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방인이었고, 외톨이였다. 오직 두 사람만이 함께하는 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 거기엔 어쩌면 내 잘못도 있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 내가 고집스레 지은 일본식 목조 가옥.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플라스틱 지붕과 회색 시멘트벽이 늘어선 시골 마을에서, 우리 집은 마치 점토 위에 그어진 한 줄기 검은 먹선처럼 돌연히 솟아있었다. 삼나무 골조가 뿜어내는 기상과 정원의 자갈길이 자아내는 고요. 그 완벽한 장인정신이 우리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80년대 초반, 반일 감정이 짙던 시절. 아내는 내가 나서길 원했다. 하지만 나는 마을의 전근대적 씨족 문화에 굽실거릴 수 없었다. 어른들 앞에 허리 굽히고 술상 들고 찾아다니는 일이 치욕스러웠다. 나는 그저 게으른 위로만 건넸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언어도 늘고 친구도 생길 거라고.
늦가을의 장날 오후, 우연히 아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친 채 그녀는 물속을 걷듯 더디게 걸었다. 놀라게 해주려 발소리를 죽여 따라가다 문득, 귀에 들려온 작은 속삭임. 주변에 아무도 없자 그녀는 고향 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람결 같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듯. 나는 그녀의 움츠러든 등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아들이야 비록 친구는 없을지언정 그래도 우등생이었다. 점차 학교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아내는 완벽한 고립 속에 있었다. 우울증이 점점 깊어졌고, 나와의 관계도 끊어졌다. 그녀의 세상에는 오직 아들뿐이었다.
아들은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책가방을 둘러멘 채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토요일엔 반나절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돌아왔다. 일요일은 하루 종일 집을 지켰다. 친구들이 읍내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만화방에서 피로를 풀고, 분식집에 모여 수다를 떨 때도, 아들은 아내와 함께했다. 사춘기의 반항도, 방황도 없이 오직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나는 그런 아들을 보며 항상 의문이었다. 이걸 효자라고 해야 하나, 마마보이라고 해야 하나….
원래대로라면 박 양에게 식사를 제안하려던 참이었다. 저녁은 부담스러울 테니, 가벼운 토요일 점심으로 시작하려 했다. 긴 포니테일을 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들어갈게."
"예, 들어가세요."
박 양의 눈빛이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아니, 이건 분명 단순한 망상이 아닐 텐데.
그날 밤, 서재 앞 복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돌아올 침묵이 두려워서였다. 또다시 상처받고 도망치는 악순환이 뻔히 보여서였다. 하지만 지금 돌아서면 다시 용기 내기까지 한참일 텐데….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말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지쳐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발소리. 아들이었다.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 녀석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리 오라며 급히 손짓했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엄마한테 좀 물어보고 올래? 이번 토요일에... 점심 먹자고."
"점심이요?"
"응, 다 같이."
아들은 눈이 커지더니 "여쭤볼게요." 하고는 아내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거실에 앉아 채널만 돌렸다. 기대하지 말자, 어차피 거절하겠지. 손톱 끝으로 꾹꾹 리모컨 버튼을 눌러댔다. 그러다 들린 발소리. 등 뒤에서 아들의 차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자고 하셨어요."
황급히 그를 돌아보며 하마터면 '정말이지?'라고 되물을 뻔했다. 겨우 "그래... 그럼, 토요일 한 시에..."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희망이 가슴을 부풀린 탓이었다.
이튿날, 가정부에게 전화했다.
"이번 토요일이요. 온 식구가 함께 식사하려고요..."아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정성껏 준비해달라 부탁했다.
"연어는 제가 직접 굽게 재워만 두세요."
"선생님이 직접요?"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직접 하겠다고 한 건 그녀를 불러들이기 시작한 지 5년 만에 처음이었으니.
토요일이 되어, 또다시 이른 시간 일어서자, 박 양의 긴 시선이 따라왔다. 무언가 묻고 싶은 듯이.... 역시 내 상상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아내가 더 급했다.
서둘러 차를 몰아 백화점 지하로 향했다. 케이크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아내가 좋아할 만한 걸 고르자니 마음이 설렜다. 딸기가 듬뿍 올라간 케이크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빨간 딸기와 하얀 생크림의 조화가, 단 것을 멀리하는 내 눈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가정부의 정성이 가득했다.
프라이팬에 연어를 올리자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콤하고 짭조름한 향이 퍼졌다. 주방에 들어선 아들이 요리하는 내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엄마 모시고 와."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아들은 혼자였다.
"싫다고 하셨어요."
"왜?"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는 어투였다.
부풀었던 가슴이 푹 꺼져 내렸다. 수년 만에 피어오른 희망을 이렇게 꺾어버리다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내려다본 연어는 이미 검게 타올라 있었다. 재빨리 불을 껐다.
마음을 바꾼 이유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내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무거운 발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오늘은 같이 먹기로 했잖아."
굳게 닫힌 장지문 앞에서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시나 아내의 대답은 없었다. 차가운 적막이 길어질수록 가슴 한켠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등신처럼 멀거니, 등신대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내 뒤에 서 있던 아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나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틈 너머로 작은 속삭임이 들리고, 이내 아들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냥 싫다고 하세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냥 싫다니. 맞붙어 싸울 수도, 설득할 수도 없는 대답이었다. 이유가 없으니까.
힘없는 발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아내를 위해 차린 밥상이 그대로였다. 빈자리만 더 도드라져 보이는 의자 세 개. 결국 나 혼자 앉았다. 주방에 돌아온 아들은 묵묵히 아내의 상을 작은 쟁반에 다시 차렸다. 밥은 작은 공기에 반도 채우지 않았고, 반찬도 달걀말이와 된장국 조금뿐이었다. 내가 공들여 준비한 여러 반찬은 무색하게 자리만 지켰다.
"그게 뭐야, 이것도, 이것도 가져가."
일본식 김 조림과 가지 미소 무침을 가리켰다. 아내가 즐겨 먹던 반찬들이었다.
"이제 간이 센 건 안 드세요."
아들은 흘깃 보더니 마치 누구나 아는 사실인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내가 먹지도 못하는 밥상을 차리고 있었던 건가. 왜 이 녀석은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건가.
"저는 나중에 따로 챙겨 먹을게요."
아들이 무심히 중얼거리고는 쟁반을 들고 사라졌다.
결국 나 혼자다. 또다시 마주한 혼자만의 밥상. 젓가락을 들어 차려진 반찬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두부 히야야코, 김조림, 달걀말이, 가지 미소 무침, 된장국. 젓가락으로 이걸 집었다 저걸 집었다 하다가, 결국 무엇인지도 모를 음식을 대충 입에 밀어 넣었다. 입속이 꺼끌거렸다. 한두 입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는데 뱃속은 돌멩이를 가득 채운 듯 묵직했다. 벌떡 일어나 모든 음식을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었다.
프라이팬에는 연어가 그대로였다. 싱크대를 붙잡은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검게 그을린 껍질이 뒤틀려 올라가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태운 냄새. 입안에 맴도는 쓴맛. 그 연어마저 쓰레기통으로 넣었다.
그러고도 냉장고에 하나가 남아있었다. 흰 상자, 그 속의 생크림 케이크. 그 깨끗하고 예쁜 것을 버릴 수가 없어서, 손가락으로 크림을 찍어 먹었다. 혀가 녹을 듯 달고 부드러웠다. 단 것을 싫어하는 내가, 눈물이 핑 돌 만큼 맛있었다.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잘랐다. 접시에 포크와 함께 하나씩 담아 아내의 방문 앞으로 갔다. 장지문을 살짝 두드리자, 아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또 뭐냐는 눈빛이었다.
"엄마랑 같이 먹어."
"아... 잘 먹을게요."
아들은 접시를 받아 들고 들어갔다. 나는 복도에 남아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문 너머 방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들이 아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평소의 차분한 어조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듯 밝고 과장된 목소리였다.
"둘이서 누가 더 잘생겼냐고 입씨름하길래, 마침,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지나가고 있었거든요. 장난으로 '쟤한테 물어보지 그래?' 했어요. 그런데 이 녀석들이 진짜로 물어보는 거예요. 누가 더 잘생겼냐고."
웃음기가 밀려드는 목소리로 아들은 이어갔다.
"얘가 좀처럼 대답을 못 하다가, 녀석들이 재촉하니까 결국 울음을 터뜨렸어요. 왜 우냐고 물었더니..."아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코믹하게 높아졌다.
"둘 다 못생겨서 도저히 못 고르겠다고, 제발 자기 좀 보내달라고!"
"어머, 어떡해."
아내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맑은소리였다.
"둘이 잔뜩 주눅 들어서 저한테 또 묻는 거예요. 서로를 가리키면서 정말 내가 얘만큼 못생겼냐고. 제가 또 울먹였죠.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 제발 저 좀 보내주세요!'"
방문 틈새로 아내의 웃음소리가 다시 새어 나왔다. 잠시나마 소리 내어 웃는 아내의 목소리에, 우울이 깃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나는 무거운 다리를 끌어올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으로 돌아가는 길, 이상하리만치 아무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다. 마취된 것처럼 걸었다.
그다음 주는 평소처럼 보냈다. 직원들을 다그치고, 퇴근 시간이 맞으면 두어 번 박 양을 태워다주었다. 차 안에서는 인허가 서류 이야기만 했다. 토요일, 백화점 지하의 익숙한 케이크 가게를 찾았다. 이번엔 여러 가지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였다. 빨갛게 익은 딸기, 노란 망고, 초록빛 키위가 하얀 생크림 위에서 반짝였다.
느지막한 오후, 과일이 가득한 쪽으로 케이크를 두 조각 잘랐다. 칼끝에 묻은 크림을 살며시 핥았다. 혀가 녹아내릴 듯 달았다. 아들 손에 들려 보내고 또다시 차가운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아내의 방에 귀를 기울이면, 아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상을 풀어놓고 있었다.
"우리 반에 야매 소설가가 있어요. 친구들 이름으로 무협지를 쓰는데, 한 편당 500원을 받았거든요."
아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배어났다.
"웃긴 게 뇌물을 준 애들 무공이 점점 세지는 거예요. 어떤 놈은 하루아침에 고수가 돼서 다른 애들을 막 때려눕히고, 결국 들통났죠. 처음엔 그 작가가 '무공의 강약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둘러댔는데…. 다들 사기라고 몰아붙이니까 열받았는지..."극적인 순간을 즐기듯 아들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서?"
아내의 목소리가 기대감으로 들떴다.
"세계 3차 대전 발발! 전 인류 멸망!"
"에, 정말?"
"무협지인데 무슨 핵폭탄? 너 제대로 좀 하라니까, 그 친구가 홍시처럼 빨개져서는..."
방문 틈새로 아내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래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맑고 가벼운 웃음이었다.
시청 앞을 지나친다 좌회전하면 면옥집이 그대로라는 것을 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아빠들이 가득할 것을 안다
거기 고기 육수가 정말 맛있다는 걸 안다
기대어오는 아내의 팔짱이 따뜻하고, 꼼찌락거리는 아들의 손이 귀엽고, 뜨거운 고기 육수가 정말 맛있고, 그런데 지나친다
아내도 어린 아들도 잃어버린 나는 햇살 좋은 날도, 비 오는 날도, 눈 내리는 날도 지나친다
매일 시청 앞을 지나친다
박 양이 책상 위의 서류 더미를 정돈했다. 가방과 지갑을 챙기는 손길이 조용했다. 커피 얼룩이 남은 종이컵 하나가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툭.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그 볼품없고 구겨진 그것이... 왠지 나같이 보였다. 집에 가기 싫어서 서류만 바라보는 나. 아내의 방문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서는 나. 혼자 먹기 싫어서 밥도 거르는 나.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나는 황급히 일어섰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던 그녀가 뒤따라오는 나를 보고 문을 잡아주었다.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툭 내뱉었다.
"점심 같이 먹을래?"
“오늘 점심이요?”
박 양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토요일 오후의 복도가 텅 비어 있었다.
“응.”
“저희끼리요?”
또다시 의아한 목소리.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평소보다 붉어 보였다. 순전히 내 망상이겠지만.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래.”
나는 최대한 무심히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에 순간 연민이 스치는 것도 같았다. 팅.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비좁은 공간에 단둘이 서자 그녀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내 발끝만 바라봤다.
"좋아요."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떠돌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그녀가 조수석에 앉았다. 나는 무얼 먹고 싶은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게 나았다. 이미 내 목소리에서 구차함이 묻어나고 있었으니까.
"시청 앞 면옥집 가본 적 있어?"
"아뇨."
"거기 갈비 괜찮아."
맛있다는 말도 덧붙이려다 삼켰다. 이미 충분했다.
차 안에는 방향지시등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몇 번 꺾으니 금방이었다. 주말의 면옥은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북적였다. 주차장에서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모들이 보였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 나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불판 위로 환기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줄게.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저는 다 잘 먹는데, 알아서 골라주세요."
특선 갈비를 주문했다. 왠지 가장 비싼 걸로 사줘야 할 것 같았다. 나랑 같이 밥 먹어주는 게 미안한 일인 양.
"냉면도 먹을래? 여기 육수가 맛있어."
이곳은 냉면을 시키면, 뜨거운 주전자에 담긴 고기 육수를 물처럼 마실 수 있었다. 그 부드럽고 진한 맛이 좋았다. 박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거렸다. 아줌마가 와서 뒤집어주기도 전에 나는 가위로 작게 잘랐다. 어린 아들이랑 오던 때의 버릇이었다. 새끼손가락 크기로 작게 잘린 고기를 좋아하던 그 작은 입. 나도 모르게 가위질하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박 양이 내 눈치를 슬그머니 보았다.
“제가 할게요.”
“그냥 먹기나 해.”
박 양이 고기를 한두 점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쌀밥을 크게 떠서 복스럽게 먹었다. 박 양의 앞접시로 잘 익은 고기를 몇 점 더 밀어주었다. 뭐든 잘 먹는다더니, 정말 잘 먹었다. 그게 왠지 마음에 들었다.
“박 양은 연애 안 해?”
갈비를 집어 먹던 그녀의 젓가락이 잠시 멈췄다.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작년 겨울에 헤어지고... 소개팅도 몇 번 하고 그랬는데, 잘 안됐어요.”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이러고 있지.
“아무나 대충 만나. 홀애비한테 시집가는 수가 있어.”
날카롭게 스치는 젓가락질 소리. 그녀의 젓가락이 냉면을 거칠게 휘저었다. 표정은 굳어있었다. 나는 슬쩍 변명처럼 덧붙였다.
“내 여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야.”
박 양의 눈이 커졌다.
“여동생이 있으셨어요?”
“셋이나.”
“어머머, 저도 남동생이 셋인데.”
나는 그런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냉면을 휘젓고 있었다. 툭툭 잘린 고기를 면발 위에 얹었다. 한 입 크게 밀어 넣고, 주전자의 뜨거운 육수를 한 모금 마시자 진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박 양은 여전히 신기한 듯했다.
“진짜 신기하다.”
그게 대체 뭐가 대수롭고, 뭐가 진짜 신기한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박 양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면옥집에는 작은 빵 가게도 딸려있었다. 가족단위 손님들 대상으로 아이스크림이며 크림빵, 밀크쉐이크를 팔았는데, 마지막 방문 이후 거의 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였다. 신기한 걸로 따지면, 나는 이쪽이 훨씬 더 신기했다. 나는 박 양을 흘깃 보았다.
"뭐 좀 마실래?"
"배부른데, 전 됐어요."
한때는 우리 가족의 주말 코스였다. 갈비와 냉면을 먹고 나면, 아내에게는 슈크림을, 아들에게는 밀크쉐이크를 사주었다. 아내야 여전히 디저트를 좋아하겠지만, 아들 녀석은... 나랑 입맛도 비슷하다. 단 거 어릴 때나 좋아했지.
"슈크림 한 상자랑... 밀크쉐이크 두 개 주세요."
그래 놓고 두 잔이나 주문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차에 타서 테이크아웃한 밀크쉐이크를 컵 홀더에 꽂았다. 신호를 기다릴 때,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입안이 너무 달고 차갑고,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면 텁텁했다. 녀석에게 이딴 걸 줘도 될까.
또다시, 박 양은 집 앞이 아닌 건널목에서 내렸다.
"내일 봐."
박 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내일은 일요일이지.
"아니, 월요일에 봐."
내가 머쓱하게 말하자 박 양이 웃었다.
"월요일에 봬요."
집으로 향하며 밀크쉐이크를 쪽쪽 빨아 먹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찹쌀떡같이 작은 얼굴. 호두알같이 동그란 눈동자. 사탕을 문 것처럼 통통한 두 볼. 토끼처럼 작은 손으로 컵을 꼭 붙잡은 모습을 보며, 혹시 떨어뜨릴까 가슴을 졸였는데.
집에 와보니 그 작고 귀여운 아들은 온데간데없고, 나와 덩치가 똑같은 사내새끼가 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버리는 걸까. 나는 상심한 마음으로 흐물거리는 종이컵을 아들에게 건넸다.
"이거 너 마셔."
거의 반강제다. 아들의 눈이 대굴대굴 굴렀다.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슬쩍 들여다보더니 반쯤 녹은 걸 보고는 살짝 찌푸렸다. 저거, 안 마시고 버리는 건 아니겠지.
"잘 마실게요."
"이건 엄마 갖다 드려."
슈크림 상자를 건네주자 녀석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갔다. 나는 또 슬쩍 차가운 복도에 주저앉았다. 아들은 벌써 아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체육 시간 다음이 수학이었어요. 여자 선생님인데..."
아들의 말 사이로 쪼르륵, 밀크쉐이크 빨아 먹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늘 우리 반 냄새가 제일 심하다고 질색하셨거든요. 등줄기까지 땀범벅인 남고생 사십 명이 좁은 교실에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그 냄새가 얼마나 대단했겠어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숨 막히는 냄새가 상상됐다.
"이번엔 체육 수업이 일찍 끝나서 다들 씻고 왔어요. 선생님이 들어오시자마자 자랑스럽게 말씀드렸죠. '저희 씻고 왔어요!'"
쪼로록- 아들의 말 사이로 밀크쉐이크 빨아 먹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창가에 걸린 수건 한 장을 발견하셨어요. '수건은 다들 어디에 걸었니?' '저 수건 하나로 다 썼는데요?' 선생님이 경악하셨죠. 반 전체가 수건 한 장으로 몸을 닦았다니까요. 게다가 그 수건 옆엔 젖은 교복 셔츠까지 한 장 걸려있었거든요."
아들이 잠시 말을 멈췄다.
"누구 거였을 것 같아요?"
"반장? 종현이? 수용이?"
아내가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댔다.
"내 거요."
"너?"
"네. 선생님이 묻길래 솔직히 말씀드렸죠. '샤워하고 교복 셔츠로 닦았어요. 수건 돌려쓰기 싫어서요.' 선생님이 '그럼 지금 입고 있는 건 누구 거니?' 하시길래 '모르겠어요. 그냥 있길래 주워 입었어요.' 했더니, 선생님이 '주인 나와봐, 얼른.' 하셨는데 결국 아무도 안 나타났어요."
"지금 입고 있는 거..."
"네, 그 셔츠예요."
아내가 질겁하며 소리쳤다.
"더러워! 누구 건지도 모르잖아! 당장 갈아입어!"
이번엔 나도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