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ESI Dec 01. 2022

때론 완벽한 '혼자'가 되어 봐야 한다.

 이전까지의 내 인간관계가 OX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다양한 색깔의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어우러져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때론 옅게 때론 짙게 다양한 농도의 관계를 그리고 싶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또는 나와 보색을 이루는 사람을 만나면 조금 더 짙은 관계를 맺어도 좋겠지. 관계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였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 21. 7. 27. 일기 중




 나는 선천적으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친구들과 잘 놀다가도 집에 오면 꼭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혼밥이라는 단어가 알려지기 전부터 혼자 밥을 먹었고, 혼자 영화보고 여행하고 놀러다니는 걸 좋아한다. 유유상종이라더니 내 친구들도 모두 나와 같아 몇 달에 한 번 봐도 서운해하는 법이 없다.






 현대에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수 세기 전에 태어났으면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에서 도태되어 죽었겠지.


 분명 나와 같이 개인주의 DNA를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 중심 사회에서 모두 도태되었을 텐데, 어떻게 그 명맥을 이어져 나에게까지 도달했는지 모르겠다. 찰스 다윈의 뒤를 이을 유전학적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불편하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냐만은 나는 그 반감이 더 큰 편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 익숙하지 않은 장소, 좋아하지 않는 주제는 모두 자극이 되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맞지 않은 조각을 억지로 구겨넣은 듯 하다. 그런데 다 들어가지도 않는 거지.


 나는 그 '순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나도 불편하고 저들도 불편하고.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지?'


  그 이유를 끝끝내 찾지 못했다.








 이런 성향은 성인이 되고 더 심해졌다. 나는 체질상 술을 못 마시는데, 한국 사회에서 술을 못 마신다는 건 사회생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대학 신입생이 술을 못 마신다는 건 학교 생활을 하지 말란 것과 동의어였고. 고작 그거 마시고 끝내냐는 타박, 딱 한 잔만 더 마시라는 무언의 압박, 술에 취해 내뱉는 예의없는 말들.


 는 무례함 에 앉아있노라면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재미없는 술자리, 억지로 마시는 술을 견딜 바엔 혼자 있는 게 편했다.








하루는 아는 선배가 내게 말했다.


 “너는 사람들에게 벽을 치는 것 같아.”


 아마 술김을 빌려 내비친 진심이었을 것이다.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말라는.


 그 따뜻한 마음 앞에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저 사람들한테 벽 쳐요.”


 욕해도 좋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눈치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명하자면, 그 당시만 해도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불편한 사람들과 불편한 시간을 가질 바에는 차라리 혼자가 되고 말겠어. 불편함을 견딜 바에는 외로움을 참는 게 더 편했다.




선배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말했다.


 “대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을 많이 만나는 거야. 사람 좀 만나고 다녀.”


 그 앞에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궁시렁 거렸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그들이 틀리고 내가 맞았다고 생각한, 그런 오만한 때가 있었다.








 인간관계를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된 건 상담을 통해서였다.


 “사람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요. 만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져요.”


 투덜거리는 내게 상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어쩌면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사람이 좋은데 부담스러운 걸지도 몰라요.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들이 계속 쌓이면서 ‘나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이야.’라고 믿게 된 걸 수도 있어요.


 생각을 바꾸고, 긍정적인 인간 관계를 가져보려고 노력해보세요. 긍정적인 경험이 쌓이다보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관계에 대한 좋은 경험.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런데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나도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처음 느껴보는 희망과 기대감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나는 정말 사람이 고팠던 걸지도 모른다.








 백수가 되고, 사람들을 피해다니고, 코로나가 터졌다.


 처음 1년은 너무 편했다.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1년 쯤 지나니 그게 아니더라.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만나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용건없는 연락을 해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먼저 불러낸 적도 없었으니까.


 그제야 깨달았다. 먼저 연락하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들이 얼마나 내게 마음을 쓰고 있었는지.


 관계라는 것은 두 사람의 온전한 노력와 에너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여전히 나는 사람이 어렵다. 먼저 연락하는 것도 어렵고, 뚜렷한 목적없이 안부를 묻는 것도 어색하다.


 그래도 이젠 누가 나를 부르면 지체없이 달려나가려고 한다. 그이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온전히 혼자가 되어보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릴까? 글쎄, 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그 그게 최선이었다. 내 마음을 지킬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아예 자극을 피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했던 게 아닐까.


 이 또한, 혼자가 되었기에 얻을 수 있는 힘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하면 안되는 일에 손을 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