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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SI Dec 22. 2021

우리 딸은 '예비 작가'야

내가 작가가 된 순간

    처음으로 부모님께 작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 작가가 되고 싶어." 그 한 문장을 말하려고 몇 달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고작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 고민하냐며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말이었다.


    나는 인생의 절반을 이 문제로 부모님과 싸워왔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 했고, 부모님은 내가 공부를 하길 바라셨다. 내가 조금 더 컸을 때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싶어 했고,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후에야 그 일을 하길 바라셨다. "네가 글 쓰는 걸 뭐라 하는 게 아니야. 그래도 사람이 경제력은 있어야지. 우린 많은 거 안 바란다. 그냥 네가 먹고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직장 갖고, 그때 너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부모님 말씀이 맞았다.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하고,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집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글 쓰는 일은 돈도, 경제력도, 집도 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라,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언제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다음에, 나중에, 언젠가, 좀 더 나아지고 나면. 그 말들은 내게 더 이상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 '나중'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안의 모든 인내심이 바닥 나, 지금 당장 글을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사회에서 말하는 '중요한 것'들은 이제 내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지금 당장 글을 쓰지 못하면. 그래서 나는 너무 오래되어 케케묵은, 우리 가족의 금제를 수면 위로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작가가 되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나 작가가 되고 싶어."

    거실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순간의 침묵이 영겁과도 같았다. 엄마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작가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거야. 김은희나 김은숙 같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거라고. 네가 그 사람들처럼 글로 성공해서 살 수 있겠어? 글 쓰는 거 좋아, 근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려고? 일단 직장을 갖자. 그다음에 회사 다니면서 너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잖아."

    똑같은 말, 똑같은 대답. 나는 모든 의지를 상실했다. 말없이 방에 들어가 펑펑 울었다. 어차피 이럴 거란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나를 지지해주길 바랐던 모양이다. 그 뒤, 다시 그 문제는 우리 가족 사이의 금기가 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글을 썼다. 부모님도 내가 취업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셨지만, 뭐라 하진 않으셨다.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렇게 1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부모님은 여전히 나에게 뭘 하냐고 묻지 않으셨다. 얼마나 답답하실까. 나는 그분들의 속마음을 짐작하면서도 모른 체했다. 그런 것까지 감당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 힘들어,라고 자위하며.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주변에서 딸 요즘 뭐하냐고 물어보길래, '예비 작가'라고 했어. 작가 지망생이지만, 앞으로 작가가 될 거니까! 예비 작가지. 그래서 작가로 성공할 거라고 그랬다." 아빠는 껄껄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그랬어?" 그리고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예비 작가'라는 단어를 몇 번 되뇌어 보았다.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는데,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이룬 기분이었다. '나는 작가야. 나는 예비 작가야.' 나는 밤새 그 순간을 곱씹었다.

    다음 날, 엄마가 말했다. "어제 아빠가 하는 말 듣고 엄마도 많이 반성했어. 저게 진짜 믿는 거구나 싶더라. 엄마가 그동안 우리 딸 많이 믿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엄마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괜찮아, 이젠." 엄마 손은 조금 거칠고 많이 따뜻했다. 그동안의 빙하기를 순식간에 녹일 만큼.


    스티븐 킹은 말했다. 다른 사람이 작가라고 불러주어야만 작가가 되는 건 아니라고.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아빠가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작가가 될 수 있었으니까.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글을 쓸 것,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할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작가라고 불러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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