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현관문을 뛰쳐나온 서윤은 한동안 무작정 걸었다. 숨은 가빴지만, 가슴은 더 뜨거웠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냥 태어나지 말걸 그랬다고….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분노가 먼저였지만, 이제 그 말이 엄마의 손보다 더 세게 자신을 때리는 것 같았다. 후회가 몰려왔다.
그런데 또 다른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지.
입술이 떨렸고, 후회와 정당화가 서로 맞부딪히며 심장을 쥐어뜯었다. 정류장에 앉자 눈물이 다시 고였다.
엄마도 억울했을 테지만, 나도 억울하다고, 나도 힘들다고.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어린이날 골목길을 달리던 빨간 자전거, 무릎이 까져도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웃어주던 엄마. 초등학교 때 산책 다녀와 함께 끓여 먹던 라면 한 사발. 시험 성적 안 좋던 날 친구들 앞에서 기죽지 말라며 쥐어주던 만 원짜리 한 장. 아무것도 없던 날들이었지만, 그 소소한 기쁨이 지금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과 달랐지만, 분명한 건 지금도 내 엄마라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서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말했을 때 묻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굳이 그림이 아니어도 서윤의 선택을 믿고 응원해주던 사람이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서윤의 꿈을 위해 자신의 꿈을 묻어둔 사람이라는 걸, 서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워하면서도 떠날 수 없었다. 언니처럼 자취방으로 떠나 편할 수 있었을까. 자신은 끝내 엄마 곁에 남아야 한다고, 언젠가는 그 온기가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다.
차츰 마음이 가라앉자, 서윤의 가슴에는 연민과 동정이 스며들었다.
“우리 엄마도 남자만 잘 만났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전생에 무슨 죄를 그렇게 지어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 엄마…”
서윤은 주머니 속에서 지갑에서 낡은 종잇조각을 꺼낸다. 일곱 해 전, 엄마가 술김에 써놓고 일기장에 꽂아 놓은 편지였다. 종이는 이미 누렇게 바래 있었고, 모서리는 해질 대로 해져 있었다. 서윤은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서툴지만 둥그렇고 밝은 글씨체. 그러나 슬픔이 가득 담긴. 마치 엄마와 닮아있었다.
사랑하는 서연이와 서윤이에게.
예쁜 우리 딸들 엄마가 항상 미안해. 더 해주고 싶은 것도 많고, 잘 해주고 싶은데 엄마가 너무 부족하지.
엄마가 너무 어린 나이에 너희를 낳고 부족하게 키워서 미안해. 엄마도 몰라서 자꾸 서투네.
우리 서연이, 아빠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만큼 뭐든지 혼자서도 잘하고, 의젓하게 커줘서 엄마가 많이 의지하는거 알지?
막내 서윤이는 엄마가 뭐라해도 항상 웃어주고 이해해줘서 너무 고마워.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거 같아 미안해.
너무 자랑스럽고 멋지다. 내 딸들.
너희는 이미 엄마한테 효도 다 한 거 알지? 너희 태어나고, 걷고,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말하고. 그걸로 됐어. 엄마는 충분히 행복했어.
예쁜 공주들 덕에 엄마는 살아갈 힘이 나. 엄마가 더 잘할게.
맛있는 닭볶음탕 해놨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먹어요. 사랑해.
엄마가.
서윤의 시야가 번졌다. 지워진 잉크 자국 위로 새로운 물방울이 번져갔다.
“짜증나…”
입술이 떨리며 중얼거렸다. 저 글을 쓴 사람이, 지금은 왜 저렇게 무너져버린 걸까.
그럼에도 서윤은 알았다. 저 종이만큼은, 술에 취해도 변하지 않는 엄마의 마음이었다는 걸.
그래서 도망칠 수 없었다. 이 꼬깃한 종이가 오래도록 서윤을 붙잡아줬다.
편지를 다시 정성스럽게 접어 넣고 서윤은 발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