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그림자-6

by 하늘

‘서윤이…’


생각이 스치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가방을 들쳐 메고 현관문을 닫자, 복도 끝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계단 아래, 어두운 입구 옆에 서윤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옷자락은 바람에 흔들렸고, 눈가는 이미 부어 있었다. 서연은 숨이 턱 막히며 옆으로 내려앉았다. 차가운 시멘트가 다리를 파고들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간격만 남아 있었다.


“왜 그랬어.”

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 자국이 얼굴을 더 작아 보이게 했다.

“뭐가 왜 그래야 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목소리는 원망으로 떨렸다.


“언니는 나가 살아서 몰라. 맨날 나는 엄마 기분 맞추고, 투정 다 받아내고… 얼마나 힘든데.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기나 해?” 서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런데도 엄마는 항상 언니 편이야. 어릴 때도 언니랑 싸우면 나만 혼났잖아. 나는 안중에도 없어.”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너였어. 기억 안 나? 치킨 먹을 때 닭다리는 항상 네 몫이었어. 나도 좋아했는데, 엄마는 내가 날개만 좋아한다더라. 아직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네 건 다 알잖아.”


서윤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증거가 돼? 유치해. 내가 느끼는 건 언니랑은 달라. 난 엄마가 정말 날 안 본다고 느껴.”


서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유치한 건 너야. 사춘기가 늦게 온 거야?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 아빠 없이 우리 키우느라 엄마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면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연은 차갑게 식은 계단을 내려다보고, 서윤은 팔목을 꼭 끌어안았다. 숨결만이 들리고, 둘 다 입을 열지 못했다.


서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언니가 부러워. 혼자 사는 게.”


“너도 독립하면 되잖아.”


“언니도 알잖아. 나는 언니처럼 뭐든 혼자 못해. 그리고 나마저 이 집에서 나가면 엄마는 어떡해.”


“그걸 왜 네가 걱정해? 엄마 인생은 엄마가 저렇게 만든 거야. 너는 너 인생 살아.”


“언니는… 엄마가 안 불쌍해?”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윤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불쌍해. 근데 서연아, 나는 우리가 더 불쌍해. 자식은 선택으로 된 게 아니지만 부모는 선택으로 된 거잖아. 그에 따른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나도 알지. 그런데 난 엄마가 같은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너무 가여워. 언니도 알잖아. 엄마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우리 굶기지 않았잖아. 그리고 엄마는… 엄마도 없었잖아.”


말끝이 벽에 부딪히듯 끊기자, 서연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숙였다.

“… 맞아.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그녀는 씁쓸히 웃으며 손목을 감쌌다.

“사실 나도 그래. 엄마가 친정 없이 얼마나 외롭게 살아왔는지 알아서, 나는 못 그러겠어. 아무리 못나도 옆에 있는 게 나한테 더 좋을지도 몰라.”


“언니! 손목 왜 그래!”

서윤이 화들짝 놀라 언니의 손목을 잡아챘다. 희미하게 남은 상처 자국이 손끝에 닿았다.


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술을 깨물고 고백했다.

“… 사실, 누가 그러더라. 내가 살려면 엄마랑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근데, 그게 가능하겠어?”


그제야 서연은 병원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릴 적부터 이어진 트라우마, 약을 처방받아 꾸역꾸역 버티고 있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육체는 건강하잖아” 하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대체 왜 혼자 버텼어. 언니도 내가 아직 애 같아?”


“그냥 내 성격이지. 근데 너 아직 애 맞긴 해.”


서윤의 눈가가 다시 젖어들었다. 서연은 손을 뻗어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붙잡아주려는 듯 서윤의 어깨를 감쌌다.


“근데 언니는 엄마한테 맨날 싫은 소리만 하면서 왜 이렇게 챙겨? 가만 보면 나보다 더 잘 챙겨주는 거 같아.”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두 사람은 먼 바닥만 바라보다가, 동시에 쓴웃음을 흘렸다.


눈은 끝내 마주치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조심스레 맞닿았다. 동시에 한숨이 흘렀다. 억울함도, 서운함도 다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둘 다 똑같이 아팠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멀리서 엄마의 흐느낌이 희미하게 번져왔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두 자매가 서로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서연은 서윤의 엄마가 되어 주었고, 서윤은 서연의 엄마가 되어 주었다. 오래도록 엄마에게서 바랐던 따뜻함을, 결국 서로에게서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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