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는 시대

by 하늘

요즘 니체의 문장을 읽고 있다.

“우울은 생명력이 다한 것들과 함께 있을 때 온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쩐지 거슬렸다.


나는 우울을 감정이라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와 정신을 잠식시키고, 스스로를 지배하는 상태. 하지만 니체는 우울을 감정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지금 내가 무엇과 함께 머무르고 있는가의 문제로 옮겨놓았다.


그에 따르면 우울과 무기력은 스스로의 무능이나 방향을 잃은 의지 때문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어떤 가치에 나를 묶어두는 상태다. 그렇다면 내가 괴로운 이유는 무언가를 잃어서가 아니라, 이미 끝난 것에 여전히 나를 걸어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생각은 묘한 낯섦과 함께 나를 붙잡았다. 과거의 실패, 떠나간 관계, 끝났어야 할 기준들.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내 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우울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성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떠나보내지 못해서.


그러자 문득 궁금해졌다. 옛날 사람들은 이 고통을 어떻게 견뎠을까?

우울이라는 단어도, 진단도, 약도 없던 시대에 그들은 이 어둠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찾아보니 그들은 이것을 병이라 부르지 않았다. 어떤 이는 멜랑콜리라고 했고, 어떤 이는 신의 시련이라 말했다. 누군가는 귀를 닫고 고독 속으로 들어갔고, 또 누군가는 사막으로 나가 침묵 속에 앉았다.


같은 고통이었지만 해석은 달랐다. 그들은 고통을 해명하려 하지 않고, 견뎌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처럼 사회를 탓하지도, 제도를 고발하지도 않았다. 고통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통과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같은 어둠 속에서도, 누군가는 성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철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지금의 시대는 인간을 위로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통을 더 얕게 만든다. 우울을 느끼면 우리는 병원을 찾고, 상담을 찾고, 누군가의 설명을 찾는다. 고통은 더 이상 견딜 대상이 아니라,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어쩌면 그 지점부터 나는 철학을 믿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은 철학을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철학자를 따른다. 그들은 사유하지 않고, 인용한다. 문장 하나를 꺼내 위로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철학이 문장으로 소비되는 시대, 고통은 더 이상 사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저 짧은 인용 속에서 치료받은 척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사유 없이는 진정한 치유도 없다는 것을.


나도 한때는 철학을 깊게 공부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문장들을 마음껏 소화하며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철학은 누군가가 이미 세워놓은 문장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통을 견디며 자기만의 문장을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누군가의 생각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왜 이 문장에서 멈췄는지, 왜 이 고통에서 질문이 시작되었는지를 끝까지 따라가 보겠다고. 철학이란 지식이 아니라, 고통을 해석하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우울을 고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붙잡고 있던 것들이 이미 끝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쓰고 있다. 고통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것이 말하려는 바를 듣기 위해. 누군가의 문장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


철학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하는 것이다. 그 결심이 시작된 밤, 한 명의 철학자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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