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과 해적
그는 찰츠부그라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가난한 이민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중국사람이었고, 아버지는 태국/베트남 혼혈이었다. 아버지는 경비원이었고, 어머니는 공장에서 일하셨다. 자녀는 4명이었고 그는 거기서 맏이였다.
그가 14살이었을 무렵, 어떤 나이키 신발에 대한 유행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그 신발을 가지고 있는 건, 대단히 쿨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또한 엄청 갖고 싶었던 그 신발의 가격은 약 200유로. 부모님께 차마 말을 꺼내보기도 송구한 가격이었다. 어느날 모로코에 여행을 갔던 그의 친구가 그 신발을 신고 학교에 온다. 친구는 그에게 자기는 40유로를 주고 이 신발을 샀다고 말했다. 2000년 초반, 그는 아직 전혀 유명하지 않았던 구글에 그 친구의 신발의 상품정보를 검색했고 그 신발을 20유로에 판다는 웹사이트에 다다른다. 밑져야 본전, 20유로 + 배송비 10유로를 아버지를 졸라서 중국 푸단에 있는 공장으로 유니온페이로 송금한다. 몇칠 후 그는 신발을 받았고, 학교에 신고가서 스타가 된다. 친구들에게 자기가 얼마에 샀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거기서 기회를 본 그는 학교 친구들에게 그 신발을 몇 켤례 더 주문해서 팔게 된다.
그리고 아하 모멘트. 그는 자기 웹사이트를 만들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신발을 팔기 시작한다. 엄청 대단하게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나름 SEO도 하고 서치에 돈도 썼지만, 소규모 웹사이트가 광고에 쓸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는 꾸준히 매달 2 - 2,500유로는 벌었다. 그 중 1,000유로는 항상 매달 부모님을 드리고 자기는 500 - 1,000 유로 정도를 용돈을 하고 대학생활을 하는데 썼다. 프랑스 최고의 대학교중 하나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직장을 구하려고 알아봤는데, 잘 구해지지도 않거니와 최고의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해도 당시에 회사들이 제시한 임금은 월 2,000유로. 그가 여유시간에 온라인으로 물건을 팔면서 번 돈이 월 2,500유로인데 풀타임으로해서 2,000유로라니 수지가 안맞는 장사였다. 2011년, 졸업을 한 그는 일생 일대의 결정을 하게된다. 프랑스에서 취업하지 않고, 자기가 물건을 수입해오는 중국, 광쩌우로 가기로.
그 동안 매월 부모님께 1,000유로를 꾸준히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아둔 돈은 많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부모님께 이번달과 다음달에는 1,000유로를 못드리겠다고 하고 (가난한 가정에서 매달 그정도의 수입이 들어오는 것은 크리티컬하다), 그걸로 비행기표를 산 다음, 중국으로 날아온다.
원래 중국에 올때 당장 묵을 호텔이라도 예약하고 오는 것이 맞지만, 인터넷으로 알아본 중국 호텔들이 다 너무 비쌌다. 그래서 그는 정말정말 싼 숙소를 찾기위해 그냥 중국에 입국했다. 공항에서 호텔을 물어봤지만, 공항에서 알아본 호텔들도 너무 비쌌다. 그래서 그는 시내로 와서 일단 3일정도를 자기 예산에 맞지않는 호텔에 묶으면서 집을 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중국어는 전혀 못했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아주 구린 프렌치 영어 정도할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만해도 구글이 아직 중국에서 금지되지 않았을 때라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어디가면 싼 집을 구할 수 있냐고 묻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본 몇채의 집은 끔찍한 상태였다. 좋지도 않은 집이 비싸기까지 했으니 짜증이 날 무렵, 그는 원룸을 빌리는 대신 그냥 방하나를 빌려서 사람들과 플랫을 공유해서 자기가 생각했던 2,000 RMB 보다 훨씬 싼, 600 RMB의 버젯으로 방을 구했다. 그의 플랫 메이트들은 두명이었는데, 한명은 그보다 6살 많은 택시운전사였고, 다른 한명은 그와 동갑인 비즈니스 번역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고, 끼워줄테니까 동업을 하자로 의기투합이 된 것이다. 플랫 메이트들은 기꺼이 조인했고 수익을 나눠갖기로 했다. 택시기사는 영업을 쉬는 날일 때마다 그를 광저우의 여러 물건을 공장가로 파는 곳들로 데리고 다녔다. 어떤 아이템을 팔까 고민을 하다가 당시 유행을 강타했던 닥터드레 비츠 헤드폰을 선택했다.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웹사이트를 만들고 주문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6개월간 아무 주문도 없었다. 그 사이에도 그는 계속 부모님께 매달 1,000유로씩 드렸다고 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돈을 안드리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혹시 걱정하시다가 프랑스로 돌아오라고 할까봐. 수중에 돈이 거의 다 떨어졌다. 프랑스로 돌아가야하나 고민할 무렵, 같이 동업했던 플랫 메이트들이 "친구, 우린 동업자잖아."하면서 모아왔던 돈을 내밀었다. 택시운전사가 모은돈 6,000불, 대학생이 갖고 있던 돈 한 12,000불, 그걸 밑천삼아 계속 마케팅을 하며 존버하던 크리스마스 무렵, 전 세계에 닥터드레 헤드폰 물량이 바닥나고, 그의 웹사이트까지 주문이 몰려들면서 대박이 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살짝 동공이 흔들렸다. 이것이 뉴스로만 보아오던 온라인으로 짝퉁을 파는 거잖아. 지금은 중국에서도 이커머스 법이 강화되어서 그렇게 하는게 정말 어렵지만, 그때는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직 충분히 성숙한 시기가 아니어서 그런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정품과 구분하기 힘들만큼 장인정신으로 정교하게 만든 짝퉁과 닥터드레는 음질때문에 사는게 아니고 거의 패션 악세서리급으로 생각하고 구매했던 막귀 소비자들의 콤비네이션으로 그는 무리없이 한동안 잘 팔았고, 이 사업의 가능성에 대해 눈치챈 중국 경쟁자들이 그의 모델을 똑같이 따라하기 전까지 아마 닥터드레보다 더 좋은 영업이익률을 누렸을 것이다. 경쟁이 이익율에 영향을 줄때쯤엔 그와 동업자들은 뽕을 뽑은 상태였다. 그는 이 세상 추레하게 생긴 택시아저씨가 이쑤시개를 물고 보스 양복 매장에 들어가서 "이거, 이거 주세요"라고 말하는걸 보는게 즐거웠다고 한다. 그렇게 한탕한 그들은 그 후 각각 자기길을 갔고, 택시 운전사와 통역가는 지금 각각 앱 사업등의 다른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저것해서 번 돈으로 광저우에 집 세채를 샀고, 그 집은 모두 각각 4배 이상 뛰었다. 부자들이 사는 지역에 살다보니, 그들과 연이 생기고, 그 연을 통해서 또 다른 비즈니스가 들어왔고, '환경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달고 그 연을 소개시켜주고 연결해주는 것만으로도 돈이 들어왔다. 그는 이미 돈이 돈을 버는 사이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가 사업을 하고싶다고 해서, 그 여자를 도와주기 위해 시작했던 사업이 가방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디자인은 명품 가방들을 적당히 빼꼈고, 자기 브랜드 로고를 박았다. 그리고 중국의 KOL, 인플루언서들을 고용해서 마케팅을 했고, 그 또한 아주아주 영업이익률이 좋은 비즈니스가 되었다. 첫해에 아주 좋았고, 둘째, 셋째해부터는 영업 이익률이 계속 줄었다. 왜냐면 뭐 하나가 되기 시작하면, 업계에 소문은 기가막히게 빨리 퍼져서 경쟁사가 금방 같은 모델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란다.
지금 그는 여러가지 사업체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블락체인 기술관련 회사로 자기는 ICO도 안했고, 마켓에 투자한게 아니고 기술에 투자한거라서 안정적으로 영위하고 있는 회사가 하나, 나머지 하나는 애들 경제교육 관련한 디바이스하나를 만들고 있다. 그 밖에 친구가 키높이 신발을 만들고 싶다고 하는데, 현재 마켓에 있는 신발들이 질이 별로라서 좋은 질에 적당한 가격의 제품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스티브잡스가 '해군이 되지 말고, 해적이 되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그도 중국의 이 wild west world에 오게 되면 '앗 ㅅㅂ, 해적질도 클라스가 다르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싶다. 중국은 존나 밑도 끝도 없는 대항해시대 무법지대였던 것 같다. 지금은 예전처럼 무법지대는 아닌 것 같지만, 아직도 중국은 대단한 해적들의 집단이다. 아이디어가 더이상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은 조금이라도 새롭고 재밌는 아이디어가 나오는 순간, 중국의 해적들은 당신보다 빠르고 더 많은 돈으로 당신의 아이디어를 해적질해 갈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갔던 인더스트리 exhibition같은 곳은 그들이 새로운 아이템을 선보여서 한방에 인더스트리에 알릴 수 있는 기회이자, 당신이 작은 기업을 영위한다면 큰 기업들의 공짜 R&D 센터이기도 해적질의 현장인 것이다.
내가 지난 3년간 일한 직장은, 해군 중에서도 가장 잘 조직되어있는 해군이다. 우리 회사의 윤리 원칙 1번이, 내가 한 일이 내일 뉴욕타임즈 1면에 난다면,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이다. 큰 회사에서 마케터로 나는 패키지에 있는 모든 클레임, 광고에 들어가는 모든 대사를 R&D와 변호사, 현지 regulation 전문가와 하나하나 검토하며 그것이 완벽하게 진실이고, 행여 경쟁사에 의해 소송이 들어와도 완전히 비즈니스를 보호할 수 있을 때만 그걸 쓰도록 허가를 받는다. 이 해군은 다른 해군을 방어하는 데에는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게릴라전을 펼치는 해적들에게는 속수무책이다. 시대는 해적의 편인 것 같다. 미디어는 계속 fragmented 되고 있고, 생산은 쉬워졌으며, 엄청난 기술산업에서 몇겹의 특허로 무장하고 있지 않는 한, 많은 제품과 서비스의 기술은 계속 평준화가 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적들의 라이프스타일이 훨씬 간지가 나잖아... 내가 재밌는 사람이고, 친구의 친구이고, 그리고 자기를 보기 위해 상해에서 광저우로 왔다는 이유로 나에게 5성급 호텔을 잡아주고, 난생 처음 포르쉐를 타고 광저우의 최고의 베이징덕 식당에서 식사를 사줬다. 커피하나도 돈을 못내게 하더라. 내가 현금을 들고 설쳐봤자 큐알코드 디밀면 직원이 나한테 영수증을 안가져온다.
그러고 보면, 그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선택을 했다. 7년전 난 무일푼으로 싱가포르로 왔고, 8년전 그는 무일푼으로 중국으로 왔다. 적당히 해적처럼 살때도 있었지만, 난 윤리의식 투철한 큰 해군에 일병으로 들어가 말단 해병이지만 오너십과 리더십을 강요(?)당하며 큰 전투의 전법을 배웠다. 일이 되게할 역량은 충분하나, 그 일이 되게 하기 위해 손발벗고 나서기 전에 큰 조직의 미로안에서 right person을 찾아 헤메는데 낭비한 시간이 얼마인가. 반면 그 사이 그는 아주 작고 훔친 보트지만 자기 자신의 보트를 만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태워 해적질을 하며 배를 키웠다. 해군 생활은 답답했지만 평화롭고 안전했다. 해적 생활은 불안하고 주변의 부담스러운 기대를 견뎌야하며 외로웠지만, 감사했다고 한다.
우리 둘은 88년생 동갑이다. 난 당연히, 아주 당연하게 그가 한살이라도 많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게 있다면 그가 1월생 내가 12월 생이라는 것 정도일까. 나이는 아무짝이 쓸모가 없단 걸 알고, 비교는 백해무익하지만 그래도 음, 이왕이면 내가 하루라도 빨리 인생을 더 충만하게 살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싶어서,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잃을 것은 많아지고 간절함은 줄어드는게 느껴져서 마음이 초조한가보다.
나는 그 어딘가에서 나만의 답을 찾고싶다. 소비주의를 싫어하지만, 진정 사람의 깊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스토리를 담은 브랜드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창업자의 고찰에 대한 답으로 나온 브랜드들은 해적질로 빼앗아 갈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라이프스타일의 함정에 갇히지 않을 예정이다. 그렇지만 그전까지 그의 해적질 하는 능력을 해적질해 배워오고 싶은 마음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