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에서 지낸 지난 8년, 나의 연말은 단 한번도 싱가폴에서 보낸적이 없었다. 뉴욕으로, 뉴올리언스로, 뉴질랜드로, 아일랜드로, 런던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정 아니면 한국으로라도 12월 17일부터 1월 3일까지 나는 기어코 장기휴가를 떠나곤 했다.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가고자 할때는 이 기간을 반드시 활용해야 했다. 이 시기에 이 동네는 그래야만 했다. 이 기간에 큰 회사는 그 어떤 곳도 일하지 않으니까.
12월 29일 싱가폴의 집 근처 카페에 와서 일을 하려고 앉아있으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아침에 운동을 하고 나와서 가벼운 근육통에 기분이 좋고, 커피가 맛있어서 또 기분이 좋다. 명상까지 하고 나왔다면 정말 완벽했을 것이다. 카페에 와서 내년에 회사에서 내가 할일을 계획하고, 이걸 통해서 내가 얻고싶은 목표를 정하려고 생각을 하는데 여기서 또 다시 커넥팅 닷을 느끼고 잘 사고 있다는 가벼운 확신에 또 기분이 좋다.
작년 생일, 난 틴더 데이트로 만난 친구(라고 내가 주장하는 사람들) 4명을 동시에 부르는 기인적인 면모를 보여가며 5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새벽 4시까지 파티를 벌였다. 오죽 시끄러웠으면 이번년도 내 생일무렵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내린 옆집 아저씨가 나를 보며 "이제 곧 너 생일이겠구나"라고 했을까 (우리 이웃은 경비실에 우리를 신고했다.)
이번 생일,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저녁에 러쉬 입욕제를 푼 욕조에서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특별한 이벤트, 여행, 이름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돈을 한바탕 써주지 않으면 초조함을 느꼈던 지난 크리스마스들과는 달리, 이번 크리스마스는 또 소소하게 친구들과 보타닉 가든에서 산책을 하며 보냈다.
특별하고 요란하지 않으면 뭔가 두려웠던 지난 날들에 비해,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시간들의 평화로움을 깊이 즐기기 시작했다. 많은 일이 있었던 지난 몇달간 정확히 어떤 이벤트가 나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서 하나만 찝기 어렵다.
어쩌면 남들이 선망하고 너무 좋았지만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회사를 관둔 그 결정이었을 수 있다.
어쩌면 스트레칭, 필기조차 금지 되었던 정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10일간의 침묵 명상을 통해 내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햇살과 좋은 음악만으로도 행복했던 3달간의 유럽 여행이 부린 마법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얘가 날 좋아하나?'에 대한 단 한번의 의심도 들지 않게 온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남자친구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서 나를 마주보는 시간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즐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난 이후 나는 상대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쉬워졌다는 것이다.
"How are you?"라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I am good" 혹은 "I am fine, today"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 난 짜증이 났었다. 인간은 그럴 수 없으니까. '기분이 좋은 날이 있고, 기분이 나쁜 날이 있는게 당연한데! 우린 모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데 왜 넌 솔직하게 말하지 않지?'
그런데 요새 내가 그렇다. 물론 매일 일어나는 기대하고, 기대하지 않아던 좋고 나쁜 이벤트들에 나의 기분도 업앤 다운을 겪지만, 대개의 일들을 나는 좀 더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평화와 가볍운 기분좋음을 유지한다.
미친듯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지난 날의 나를 기억하는 옛 회사 동료 친구들은 나의 이런 눈에 띄는 변화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얘들은 "나의 앨리스님이 성숙했다ㅠ"며 엄마의 마음을 느낀다고 한다. (타이틀을 빼고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렀던 전 회사에서는 일본인들은 XX San이라고 부르고 한국인들은 XX nim이라고 불렀었다.) 그리고 내가 급 젠(Zen)모드가 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모험의 다음단계에 접어 든 것 같다. 호기심 많고, 선한 것을 좋아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나의 근본은 그대로이지만 예전의 흔들리고 뾰족뾰족해서 때로는 남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던 앨리스는 이제 '앨리, 스님'의 정체성을 하나 추가했다. 다사다난 했고 길었던 2019년을 보내며 앨리, 스님은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과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