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은 없었고, 입학과 동시에 독립할 만큼 모아둔 돈도 없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약 1시간 20분 소요. 버스로 시작해서 지하철로 갈아탄 후 내려 언덕배기를 꽤나 올라가야만 강의실에 도착하는 통학 길이 왠지 몹시도 고단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주말 아르바이트만 했는데 늘 급여일을 일주일 반 앞두고 밥을 굶었다. 주말에 평일 중 하루를 더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로 바꿔도 쪼들리는 생활을 면치 못했다. 2년 다닌 학교를 한 해 휴학하고, 쉬는 날 없이 일해서 유럽여행 한 달 다녀오니 또 자금난에 시달렸다. 그놈의 버킷리스트가 뭐라고 금전적 여유 대신 여행을 택하다니. (버킷리스트 실행 열풍에 조금 휩쓸렸던 것도 같다.) 복학해서 수업을 일주일 중 3일로 몰았다. 그리고 주4일 아르바이트를 하니 끼니로 편의점 삼각김밥에 우유 정도는 거르지 않고 먹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때의 소망은 어디에서든 먹고 싶단 생각이 드는 디저트가 보이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사 먹는 것이었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자가 됐다. 마트 캐셔, 맥반석 오징어구이 및 핫도그 판매원, 인형 옷 알바, 전단지, 패밀리 레스토랑, 영화관, 과외, 뷔페 접시 빼기 등. 이 경험들이 훗날 도움 된 적 있던가. 끼워 맞추자면 어느 활동에서든 도움 됐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후 사회에서 겪은 모든 일은 처음이었고, 그 나름의 방식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처음은 헤매기 마련’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잘 입력한 덕에 무엇을 시작하든 긴장을 놓지 않게 되었다는 걸 장점으로 봐야 할까.
당시 곧바로 졸업하지 않고 한두 해 졸업을 유예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취업이 안 돼서’가 친구들 대부분이 유예를 택하는 주된 이유였다. 학점 평균을 좀 더 올리고, 토익 점수를 올리고, 자격증 개수를 늘리고 대외활동 이력을 더 늘리고, 뭔가를 끊임없이 올리고 늘려서 한두 단계쯤 더 좋다고들 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온 대학생들이 버둥댔다. 나 역시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유예 자체가 나에겐 모험과 같은 일이었고, 유예한다고 해서 더 나은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질 것 같지 않았다. 예민함 수치만 200% 올라간 백수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컸다. 유예란 결국 끝도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있을지 없을지 모를, 목축이기도 부족할 한 방울의 물을 찾아 헤매며 시간의 끝을 겨우 붙드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든 졸업 전에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시달렸다. 별 대단한 계기는 없었다. ‘쓴다’는 작업이 존재하는 직업군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방송작가가 됐다.
방송작가는 내레이션을 ‘쓸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당시엔 여겼다. 직업 선택의 기준이랄 게 이렇게 보자면 딱히 없었고, 저렇게 보자면 분명했다. 그렇게 한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외주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이름은 막내작가였다. 작가라는 이름을 얻긴 했는데 왜인지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난 아무것도 써내지 못했고 그럴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랬다. 막내작가에게 처음부터 대본 쓰는 일을 맡기지 않는다. 내 경험에 더해 주변을 비추어봤을 때, 처음 7분에서 10분 정도의 짧은 영상 내레이션을 쓰게 되기까지 짧게는 1년 반, 길게는 3년 혹은 그 이상의 수련이 필요하다. 내레이션을 쓰기 전까지 통과해야 할 단계가 많다. 프로그램 성격에 어울리면서도 시청률이 잘 나올 법한 아이템을 찾아야 하고, 찾은 이의 연락처를 어떻게든 수배해야 하고, 통화를 나누든 찾아가서든 섭외하고, 촬영 일정을 짜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에게 제공하는 물품(내가 일했던 곳에선 등산복을 줬다)의 사이즈를 체크해서 직접 물건을 받아오고, 해외로 나가는 프로그램의 경우 현지 코디를 구하고, 피디 및 메인작가와 코디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진행 상황을 전달해야 하며, 현지에서 촬영한 영상을 메일로 보내주면 낮이든 밤이든 즉시 받아서 프리뷰(영상에 담긴 모든 내용을 글자로 옮기는 작업. 어떤 화면이 나오고 있는지와 대화 중인 모든 말, 배경음 등을 20~30초 정도 단위로 표기해가며 빠짐없이 적음)하고, 해당 파일을 메인작가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 과정 중에 많은 날, 밤을 새운다. 그러나 촬영이 끝났다고 막내작가에게도 밤이 찾아오진 않는다. 조연출과 예고편을 만들고, 자막을 쓰고, 영상에 자막 입힐 위치를 체크하고(종종 조연출 인원이 부족해서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땐 막내작가가 직접 자막을 입히기도 한다), 보도자료를 쓴다. 이제 끝났나 싶을 때 새 아이템을 맡게 되고 이 작업들을 무한 반복한다. 낯선 이와의 끊임없는 통화와 설득, 시청률의 압박과 신박한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 밤샐 때 잠을 쫓기 위해 마시는 여러 잔의 커피와 에너지 음료로 반년 만에 몸은 엉망이 됐다. 방송 선배들은 “어떻게든 방송은 돼”라며 매일 초조해하는 나를 달래기도 했지만 과정 중 뭐 하나라도 삐걱대면 방송이 엎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한 달 80만 원의 월급. 섭외를 성공할 때 받는 약간의 인센티브. ‘막내’라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도 돈이 조금씩 모아졌다. 정말이지 돈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88만원세대』라는 책이 나온 지 약 6년쯤 지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