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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을 Nov 06. 2018

4. 어떻게든 방송 종료 0.5초 작가 생존기

4. 이 정도면 다행인 실패

회사 근처로 거처를 옮기니 출퇴근 시간은 확실히 줄었다. 그것만은.

업무의 강도는 전혀 나아질 것이 없었고, 여전히 밤새워 일했으며, 아이템을 많이 찾아서 잘 매칭이 될수록 더 좋은 아이템을 찾아올 거라는 기대만 높아질 뿐 생활이 핍진하긴 마찬가지였다. 새벽에야 퇴근이 가능하게 된 날엔 택시비와 날려버릴 시간을 걱정하며 차라리 회사에서 엎드려 쪽잠 자는 것을 택했던 전과 달리 이사를 한 다음부턴 택시를 타고 이사한 집으로 가서 한두 시간이라도 자고 다시 나왔다. 20분이면 회사에 도착하는 거리였다.

     

정말 큰 난관은 이사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서 출몰한 그것이었다.

워낙 오래되고 청결과는 거리가 먼 집이긴 했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몹시 큰 문제였다. 문을 열자마자 현관 비스름한 좁고 작은 공간을 두고 좌측으로 화장실, 우측으로 방. 그 틈틈을 차지하고 있는 바퀴벌레들. 영 친한 적 없던 검댕들을 발견한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차라리 개미였으면, 이라고 생각했다(막상 개미가 있었다면 그 또한 괴로웠을 거다. 이때 내 눈앞에 있던 건 바퀴벌레니까). 같이 살기로 한 친구와 함께 퇴근한 날이었는데 둘 다 발만 동동 굴렀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둘 다 벌레를 죽도록 무서워하는 부류였다. 한참을 신발장 옆에서 서성거리다가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하게 될 것만 같아서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 공포심에 아직 퇴근 전인 막내작가 및 조연출들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퇴근해달라 부탁했다. 모두가 우리의 이사를 알고 있었고, 그곳을 이제 아지트라 부르자던 이야기가 이전에 있었다. 하지만 그날, 불행하게도 모두 퇴근은 그른 상태였다. 심지어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고, 지금은 벌레 잡아주는 회사도 다 잔다고, 내일 아침에 꼭 벌레 잡는 회사에 문의하자고,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자느냐고. 그런데 아무래도 일의 피로가 대단했는지 울며불며 갖은 소란을 떨다가 이내 잠들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벌레 잡는 회사에 전화로 문의했으나 주택가에서 한 집만 소독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단 말을 듣고 절망했다. 게다가 소독 정기권을 끊는 것보다 일회성 소독이 더 비쌌다. 일하는 중간중간, 동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하고, 검색해보며 초강력 벌레 제거약을 찾아 바로 주문했다. 그리고 거의 인간이 짓눌릴 것처럼 온 집안에 약을 쳤다.

벌레들이 한 번에 다 사라지진 않았고, 충격적이었던 마릿수가 현저히 줄긴 했다. 매일 치약과 같은 형태의 약을 전날 짜놓은 약 위에 또 짜댔다. 이사 전보다 더 피곤해진 것 같았다.

     

같이 일하던 막내작가 동료가 선물로 그려준 그림이다. 마음 깊이 다정한 동료들이 있어 이 외주사에서 버텼던 것 같다.

여기에서 끝이라면 좋았을 텐데.

어느 날 퇴근하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려있었다. 둘이 살다 보니 친구가 문단속을 안 했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며칠 후 문이 또 열려있었다. 그 집은 골목에 골목을 끼고 들어가야 나오는 건물의 2층이었다. 경찰을 불렀고, 문단속 잘하시라는 말을 들었고 세 번째 반복된 현상에 다시 온 경찰이 휴대폰 번호를 주며 112나 해당 지역 경찰서 번호로 혹시 연결되지 않으면 이 번호로 전화하라고 했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여겼던 것이리라.

     

그즈음 ‘왜, 어떻게 독립을 했더라’ 곱씹어보게 됐다.

물론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열망도 컸지만 이건 일에 치여 아무런 준비 없이 떠밀리듯 집을 ‘나와 버린’ 비자발적 독립이었다. 난 혼자서 벌레조차 잡지 못했고, 문이 열려 있는 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머릿속에 그렸던 야무지고 반짝거리는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쩐지 우울해졌다.

     

외주사는 여전히 밤낮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계절이 바뀌어 매미가 울었다.

끈적거리는 사무실에서(에어컨 아껴서 부자 돼라, 외주사야) 땀을 뚝뚝 흘리며 여느 때처럼 열 올려 섭외하고 스케줄 배분을 하고 아이템 회의를 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충혈과 담배의 아이콘 팀장은

“우리 회사에서 6개월 넘게 제대로 일하고 떠나면 난 박수를 쳐 줘.”

식의 말을 하며 모두에게 박수를 강요했다. 회의 테이블에서 나는 박수를 받았다.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독립도, 첫 방송일을 시작했던 외주사와의 관계도 끝이 났다. 더 나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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