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가 남긴 것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어느 순간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결코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온다. 어떤 계기로 통해 순식간에 뒤바뀌기도 하고 오래 묵은 시간이 만들어낸 파도에 밀려온 낯선 이를 만나기도 한다. 그 시점의 '나'와 이 시점의 '나'는 모두 '나'임에도 타인보다 더 타인처럼 느껴진다. 나는 보통 이전에 쓴 일기를 읽다가 그런 만남이 성사되는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 질 때가 있다는 거다. 지금의 나는 늘 어렵고, 미래의 나는 늘 알 수 없다. 반면에 글과 사진으로 또 기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나는 단단하고 또렷해 보인다. 그 그리움 뒤에는 '과거의 내가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지금에까지 도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곤 한다. 만약 내가 지금과 과거의 중간에 서있다면 그곳으로 돌아가 변함없이 지금에 도착할 수 있을까.
<피닉스>의 넬리에게는 그런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그대로 남은 얼굴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넬리는 새로운 얼굴로 변신할 것을 권유받는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은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기억 뒤에 위치해있기에 더욱 솔깃하다. 하지만 성형 수술 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넬리인 듯, 넬리가 아닌 듯 어색한 모습이다. 과거의 모습 그대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다. 넬리의 얼굴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모습으로 부유한다. 전쟁의 상흔은 명의의 손길로도 되찾을 수 없는 끊어져버린 연결에 있다.
전쟁이 멈추어버린 시간에 갇혀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넬리는 익숙한 장소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그곳도 전쟁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살던 집은 형체를 알 수 없고, 다시 만난 남편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모든 것이 낯선, 그중에서도 자기 자신이 가장 낯선 넬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날아든다. 하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친구 레네와 독일을 떠나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자신을 ‘넬리를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조니와 이미 죽은 넬리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거울 속의 얼굴도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피닉스> 안에서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의 기쁨이나 다시 만난 연인과의 눈물의 상봉은 모두 미뤄져 있다. 그림자와 어둠으로 가려진 넬리 자신의 얼굴을 찾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넬리가 자신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연극은 넬리의 연극과 넬리의 연기해야 하는 에스더의 연극, 두 가지 정체성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이중 연극의 형태를 하고 있다. 넬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연극의 일부로 느껴진다. 그 연극 속에서 넬리는 자신의 삶과 경험을 부정당한다. 자신 아닌 채로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것은 그 내용이 과거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비극에 가깝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넬리는 여전히 어색한 거울 안의 넬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채로 무대 위에 오른 넬리의 방황은 전후 세대의 혼란과 맞닿아있다.
이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전쟁 이후의 넬리는 이전의 그로 돌아갈 수 없다. 완전히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시도(조니와의 연극)는 불가능하다.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조니는 그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이전처럼 붉은 드레스를 즐겨 입을 수 없다는 사실은 넬리 본인의 입으로 증언한 변화임에도 조니는 그저 과거 자신의 아내였던 넬리의 모습만을 고집한다. 눈앞에 아내를 두고도 아내를 닮은 사람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조니의 태도는 그가 넬리를 배신했을 때 이미 조니에게 넬리는 죽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하다. 살아 돌아올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지워버린 사람은 조니, 바로 자신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넬리는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도구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니가 겪은 전쟁과 넬리가 겪은 전쟁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이렇게도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그렇기에 넬리는 조니의 기억 속 과거의 자신을 연기하면 할수록,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될수록 그때의 자신과 점점 더 멀어진다.
이 영화의 제목인 <피닉스>를 우리말로 하면 불사조(不死鳥)다. 피닉스는 넬리와 조니가 재회한 장소이자 마지막 장면 속 넬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불사조, '죽지 않는 새'라는 이름 때문에 이 새는 절대 죽지 않을 것만 같지만 사실을 죽지 않는 것과 거리가 멀다. 불사조는 끊임없이 죽음과 탄생을 반복한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과 탄생이 아주 가깝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불사조는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 불사조의 정체성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불사조는 모든 것을 불태운 뒤에 남은 검은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불타오르고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피닉스>의 마지막 장면을 보았다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피닉스>인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넬리의 "Speak Low"는 가만히 읊조리듯 시작해 모든 것을 불태울 듯이 뜨거워진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넬리는 그 순간 피닉스 그 자체다. 그런 넬리를 바라보는 조니의 귀는 그때야 처음 들린 듯하고 눈은 그제야 비로소 보기 시작한 것 같다. 긴 연극 내내 넬리가 아닌 다른 이의 입으로 전할 수밖에 없었던 진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뜨겁다.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 그 누구도 감히 말을 보태지 못한다. 말문을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명히 타오르는 불길 같은 노래로 타오른 붉은 드레스는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이란 (아직까지) 없다.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결심까지 시간 위에 쌓이고, 그 시간까지 포함하는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방향감각과 정체성을 상실한 전후의 삶에서 '재건'이란 무엇일까. 최대한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일까, 최대한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일까.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의 방점이 모두 그 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데에 있다면, 그 둘 모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전쟁이란 거대한 구멍을 지워버릴 방법이란 없다. 거대한 구멍을 메우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곳에 그와 같은 크기의 구멍을 만들게 될 것이다. 재건은 과거를 지우지 않은 상태에서 구멍 위로 다리를 세우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구멍이 아무리 커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검은 재 속에서 반드시 다시 태어날 넬리의 다음이 궁금하다.
*위 speak low에 링크 걸어두었어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너무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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