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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지 Sep 15. 2021

나의 최선은 나를 무엇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최선의 삶>이 남긴 것

최선의 삶 SNOWBALL (2019)

이우정 감독


   기차가 만들어내는 굉음에 늘 귀를 꼭 막던 강이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귀를 막지 않는다. 무지막지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기차의 내부는 오히려 고요하다. 레일을 따라 한 길로 떠난 강이, 소영, 아람은 다 다른 길로 돌아왔다. 여전히 한 기차를 타고 있어도 그랬다. 한 덩어리였던 그들은 조금씩 갈라졌다. 점점 더 깊은 틈이 만들어졌고, 곧이어 덩어리가 아닌 조각이 되어버린다. 치마 길이가 달랐고, 사는 곳이 달랐고, 부모의 손길이 달랐다. 붉은 입술과 파란 입술은 너무나도 큰 차이였다. 그들은 다른 무대에 서있는 배우였다. 그들의 연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틈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들이 덩어리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세 사람의 기차표에는 다다른 이유가 적혀있었고 그 이유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란 없다.


   <최선의 삶>은 미움받는 덩어리로 함께 였던 친구들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을 계기로 뿔뿔이 흩어지는 이야기다. 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같은 로션을 얼굴에 바르며 기꺼이 덩어리라 불리던 세 사람은 낯선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서로의 다름을 인식한다. 아니, 이미 알고 있던 그 다름이 전과 다른 기세로 그들 사이를 오간다.  그 틈새로 침범하는 것은 세 사람이 직면한 외부의 세상이다. 그 세상이 구분해놓은 기준들이 강이, 소영, 아람을 고스란히 비출 때, 조금 이르게 다다른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장이라 말하는 것은 가혹하고, 현실이라 말하는 것은 허무하다. 아마 세 사람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서툰 방식으로 서로를 할퀴고 지우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이미 지나온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비루한 가정이 아닌 문장을 쓸 수가 없다. 감히 확신할 수 없는 얼굴들이 둥둥 떠다닌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며 얼굴을 구기고 눈물을 흘리는 강이의 얼굴을 보고서도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버리고 싶지는 않은 거다. 세상에 뛰어든 아이에게 세상을 들켜버린 어른은 쉽게 비겁해진다. 주제에, 주제에, 주제에.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소영의 말에 비친 세상이 내는 굉음이 웅웅 울린다. 하지만 귀를 막지는 않는다.


   영화의 원작인 동명의 소설 [최선의 삶] 속에서 좋아했던 몇몇 에피소드가 빠진 것을 아쉬웠지만 여전히 "식칼이 나의 살을 뚫고 튀어나온 가시처럼 느껴"([최선의 삶], 162쪽) 지는 영화였다. 원작을 모른 채로 봤다면 뚝뚝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부분마저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절의 나에게도(어쩌면 지금까지도) 어떤 일들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채로 둥둥 떠내려왔다. 둥둥 떠내려오는 얼굴들을 바라볼 때면 나는 '말갛다'는 단어를 감각하곤 한다. 맑은 것이 아닌 말간 것을 알게 된다. 말간 것은 늘 표정이 아니라 얼굴이다.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말을 하든 말간 것은 말갛게 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지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도 하다. 말갛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때마다 어른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가장 최악의 순간에도 나는 말간 얼굴들을 봤다. 두 번의 가출과 두 번의 이별. 티셔츠로 서툴게 감싼 칼과 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에 언뜻 행복하다가도 별안간 불안해지고야 마는 순간들이 '최선'이라고 쓰이고 있다. 다시 생각해봐도 영화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래도 책도 추천하고 싶다. 나도 영화를 본 날 서점으로 가 새로 산 책을 읽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새로 만나는 장면은 늘 있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얼굴이 적힌 문장 위로 영화의 장면이 겹치면 아마 한 번 더 영화를 보러 가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의 "최선의 삶"은 과거에 머무는 대신 계속해서 지금이 될 수 있을지도, 그렇게 된다면 비겁한 어른임에도 동시에 기억하는 조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방민아, 심달기, 한성민 배우의 연기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sns에 사는 아파트 이름을 적어놓은 아이나,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지 못해 먼 길을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볼 때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떠올리게 될 것이다. 특히 심달기 배우가 연기한 아람의 거짓말은 영화 속에서 더 잘 속아 넘어가고 싶어 진다. 심달기 배우의 눈빛에 무장해제된 탓이다. 영화의 시점이 현재가 아닌 2000년대 초반 즈음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내가 자란 시점과도 약간의 차이가 있고,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있을 10대에게도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스티커 사진이 '인생네컷'이 되고 문자메시지가 '카톡'이 되는 변화가 바꾸지 못하는 것들이 이 영화가 그린 것이기에 언제나 영향력 있는 영화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시점은 감독의 시점이 아닐까. 그렇기에 찰나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생각하다 보니 점점 더 믿음이 깊어진다. 누군가의 최선에는 기이한 믿음이 자라나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무겁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막을 내린 영화의 뒤를 상상하게 된다. 나만큼 자라서 이때를 기억할 강이를, 아람이를, 소영이를, 모든 불운한 상상을 무릅쓰고 상상해본다. 조각이 난 채로도 살아내는 그들을 희망한다. 산산조각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던 어떤 시를 믿어보기로 한다.

<최선의 삶> 스틸컷

instagram: @hangangnam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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