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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지 Oct 05. 2021

여인의 초상으로 가득한 미술관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 남긴 것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2019)

셀린 시아마 감독


영화가 그리는 사랑

이 영화는 찬란한 작품들로 넘쳐난다. 파도치는 절벽과 억새 사이에 빼꼼히 서 잇는 세 사람의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작품 같은 순간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작품이다. 보이는 것 이상을 그려낸 그림과 들리는 것 너머를 연주하는 음악이 이 영화 안에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안의 작품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작품의 탄생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 한 장면밖에 보여줄 수 없는 그림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수 없이 오고 간 손길과 눈빛을 함께 담아낸다. 그림 안에 덧대어져 있는 시간까지 작품이고 예술임을 증명해 낸다. 그 증명은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를 재정의한다. 뮤즈를 예술가의 작품 활동의 수동적인 도구로 그리는 구시대의 해석에서 벗어나, 공동 창작자로의 뮤즈와 예술가의 관계를 그려냄으로써 작품 안에 깃든 진정한 생명력의 출처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익명의 초상이 생명력을 찾아가는 과정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나란히 서 있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다. 모든 죽은 예술은 사랑을 만나고 난 이후에 살아난다. 이 사랑은 분절된 이미지와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와의 사랑이다. 마리안느가 분절된 이미지 조각에 규칙과 관습을 더해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이 엘로이즈는 물론이고 마리안느 자신도 담지 못한 죽은 그림이 된 이유다. 마리안느는 그림 속 얼굴을 지워버린다. 얼굴이 지워진 그림은 엘로이즈의 언니의 초상이었을 그림과 다를 바 없다. 얼굴을 잃은 초상은 죽은 그림 안에서 살아야 했던 모든 여성들의 초상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죽은 그림을 불태워 그 안에 있는 여성들의 삶을 되찾아 온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소피에게, 그 섬의 여성들에게, 마침내 모든 여성들에게 흘러간다.


영화 속의 흘러온 사랑은 바라보고, 덕분에 알게 되고, 영원히 기억하는 사랑이다.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모든 순간을 바라봐야 했던 것처럼 영화는 여성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삶의 모든 순간을 담고자 한다. 소피의 낙태 스토리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수많은 여성들이 공유하는 경험임에도 터부시 되는 낙태를 바라보고 기록한다. 그 기록은 단순히 카메라가 실제 소피가 낙태를 하는 과정을 직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관객과 함께 그 과정을 직시한 세 사람은 그 장면을 재현하고 그려낸다. 이 이중의 기록은 경험의 주인인 소피를 작품의 창작자로 이끄는 동시에, 여성의 삶을 마땅히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들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그들의 삶에 바친 사랑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을 뿐이다. 영화가 여성의 삶을 바라보고 알고 기억하듯이, 수많은 여성들 또한 이 영화를 바라보고 알고 기억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사랑이 끝나는 순간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이 사랑은 어떻게 끝이 날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아름다워질수록 그 끝이 두려워진다. 엘로이즈의 초상은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자 엘로이즈 결혼의 도구다. 초상이 완성되면 떠나야 하는 화가와 사랑하는 이를 떠날 수 없는 연인의 운명이 부딪친다. 이 안타까운 이별 앞에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 신화가 등장한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연인을 놓치고 마는 비운의 남자의 이야기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 의해 다시 쓰인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의 삶이 아닌 시인의 삶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에 의해 다시 지하세계로 떨어져야만 하는 에우리디케에게 발언권을 부여한다. 두 사람은 불가피한 이별에 비극을 덧씌우지 않는다. 마리안느가 놓치는 삶 대신 이어갈 삶을, 엘로이즈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대신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별이나 재회로 끝맺지 않는다. 이미 둘의 사랑은 완성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완성된 그림과 음악을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잔여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영원히 살아남을 사랑을 말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말하지 않고는 이 글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엘로이즈는 옆 사람은 듣지 못할 무언가를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어느 섬에서 연주되었던 피아노 연주 같은 것 말이다. 사랑과 음악이 동시에 연주되고 있는 그 장면 속에서 엘로이즈가 점점 클로즈업되고 배경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때, 사랑은 다시 한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영화가 끝나고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을 떠올려 본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시간을 상상한다. ‘그 사람’만 읽을 수 있는 페이지가 거기에 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기억하고 있는 사랑이 거기에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instagram: @hangangnamsan


*셀린 시아마 감독의 신작 <쁘띠 마망>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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