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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지 Aug 13. 2021

끝을 알고 길을 떠나는 이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린 나이트>가 남긴 것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데이빗 로워리 감독


아서왕은 조카인 가웨인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요청한다. 하지만 가웨인에게는 원탁의 기사들에 비할만한 이야기가 없다. 가웨인이 자신에게는 들려드릴 만한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옆에 있던 왕비는 '아직' 없는 것뿐이라고 맞받아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가웨인에게 무용담을 만들 기회가 찾아온다. 그는 게임을 제안하는 그린 나이트의 목을 내려치고 그 사건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무용담의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은 그를 '기사'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가웨인은 그의 이야기가 연극이 되고, 노래가 되고, 시가 되는 속도에 발맞추지 못한다. 1년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방탕한 생활은 전과 다르지 않다. 연극은 그의 삶보다 먼저 그의 목을 내리치고 가웨인은 연극의 결말을 따르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이 자신의 운명을 완성하기 위 해 길을 떠나는 6일의 여정을 담고 있다.


영화 <그린 나이트> 속의 가웨인은 존경할만한 기사도, 욕망에 가득 찬 왕위 계승자도 아니다. 자신의 연인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인물이다. 그런 가웨인이 모험을 떠나게 된 것은 무용담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과 그를 위해 설정된 게임의 술수 때문이다. 게임을 제안한 이는 표면적으로는 그린 나이트이지만 배후에는 가웨인의 어머니가 있다. 주술로 그린 나이트를 연회장으로 보낸 것은 분명 어머니이다. 신비한 녹색 허리띠를 아들에게 처음 전한 것도 그녀다. 이 모든 것이 마녀인 그녀가 꾸민 게임인 걸까? 어머니는 여정 내내 다양한 모습으로 분신한 채 가웨인의 주변을 서성인다. 다양한 현신들 중에서 무엇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모두가 가짜일 수도, 모두가 진짜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그들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용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때 그것은 현신을 넘어선 추상의 영역에서 스크린을 장악한다. 확실한 것은 가웨인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눈을 가린 존재가 그를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애로운 신도, 가혹한 악도 아니다. 가웨인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며 결국에는 정해진 결말 쪽으로 그를 인도한다.


결국 그린 나이트 앞에서 목이 떨어질 위기, 즉 자신이 행한 일을 그대로 돌려받아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가웨인은 기사가 된다. 그를 기사로 만든 것은 빛나는 결의나 위대한 업적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앞서서 본 가웨인이 그것을 반성할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그의 눈빛은 죽음 앞에서 또렷해진다. 가웨인의 눈에는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죽음의 결말에서 도망쳐 얻은 삶의 추악함, 왕관이 만들어낸 거짓 후광과 자신을 약탈한 폐허를 그가 다시 만들어내는 것, 그가 속한 세상이 추구하는 이익이 만들어낸 폐해가 그의 삶 속에 가득하다. 더 많은 죽음 위에 세워진 명예, 무용담들. 그가 약속된 결말을 뒤로하고 일구어낸 삶은 오히려 죽음에 가깝다. 가웨인의 눈은 그가 죽음을 선택했을 때 오히려 생의 빛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의 마지막을 내려다본다.

<그린 나이트> 스틸컷

게임을 제안하며 스스로 자신의 목을 내어준 그린 나이트는 떨어진 목을 다시 들고나갔었다. 거대한 순환은 무한하고 초월하기에 영원하다. 인간의 유한함은 그 안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원의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찰나의 존재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거대한 순환 안에서 그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영화 속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의도했다고 밝혔다. 문명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가 <그린 나이트>가 제안한 게임이다. 무한한 자연 안에서 유한한 문명은 계속해서 사라진다. 그리고 영원의 시간 속에서 또 태어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영원히 반복되는 찰나를 이야기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지금 우리의 선택은 더 이상 찰나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어떤 고리를 연결하고 또 끊어낼지는 한 인간의 삶, 문명의 흥망을 넘어서는 운명이 된다. 우리는 분명히 다시 이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웨인의 마지막 선택은 찰나의 삶이 가진 무거운 책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인형극이 전할 수 없는 환상의 이미지들은 경험하지 않고는 소통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체험이다. 아무리 귀부인이 녹색의 의미가 무엇인지 친절히 설명해줘도 결국에는 그린 나이트의 마지막 표정으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백골이 순환을 통해 다시 사람이 되는 것, 거인의 행렬, 유령과 사람, 상상과 현실, 찰나와 영원의 지워진 경계들의 이미지는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하고 그러한 무엇의 무엇이었다. 그래서인지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검은 세상에 틀어진 영상처럼, 눈을 뜬 채로 명상을 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끝을 알고 길을 떠나는 이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겸허와  그 어떤 것도 찰나인 것은 없다는 사명, 무엇보다 죽음이 새로운 삶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린 나이트>의 마지막 대사  "now, off with your head"는 영화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또 하나의 게임 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웨인과 같은 눈빛으로 죽을 수 있을까. 다음 겨울, 다시 한번 땅으로 떨어질 누군가의 머리를 기억한다.


<그린 나이트> 스틸컷


 

instagram:@hangangnam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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