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오모테섬_ 나카마강
이시가키의 리토터미널에서 이리오모테행 배를 기다린다. 바다는 먹구름으로 채도를 잃었다. 결항까지는 아니지만 파도가 제법 세다. 아니나 다를까, 고속 페리에 올라 10여 분을 달리자 공해에서 비를 만난다.
이리오모테에는 두 개의 항이 있다. 북쪽의 우에하라[上原]항과 남쪽의 오하라[大原]항. 이렇게 바람이 세고 너울이 이는 날에는 남쪽 항만 열린다. 승객이 모두 오하라 쪽으로 몰렸는지 배는 만원이다.
빗물이 맺힌 선창으로 바닷물이 튄다. 엔진 소리와 눅눅한 습기를 타고 번지는 TV 소리가 선실에 가득하다. 아무도 말이 없다. 이대로 20분만 더 가면 된다.
“일기예보는 믿을 게 못돼요. 갑자기 비가 쏟아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나죠. 이곳 날씨가 그래요.”
가이드의 말이 맞았다. 오하라항에 닿을 즈음 비가 그친다. 이곳의 3월 날씨는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스무 살 아가씨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리오모테는 오키나와 본섬보다 대만에 훨씬 가깝다. 크기만 놓고 보면 이시가키보다 크지만, 인구는 1200여 명에 불과하다. 섬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긴 호를 그리며 달리는 해안도로를 빼고는 원시의 자연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섬 주민들 중에는 풍력발전기를 돌리며 자급자족하거나, 트래킹 가이드를 하며 무분별한 개발을 막는 일에 앞장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 섬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북쪽의 우라우치강에만 400종이 넘는 물고기가 산다. 멧돼지 수만 해도 사람의 곱절은 된다. 강기슭을 따라 빽빽이 자란 맹그로브 숲에는 농게와 고둥, 말뚝망둥어를 쉽게 볼 수 있다.
《아즈망가 대왕》에 나오는 ‘마야’란 이름의 이리오모테 고양이도 이곳에 산다. 마야는 야마네코[山猫], 그러니까 우리가 살쾡이나 삵으로 부르는 야생 고양이다.
이리오모테에만 사는 이 고양이는 여느 표범살쾡이와는 외모가 조금 다르다. 이마에서부터 머리 뒤로 대여섯 개의 줄무늬가 있지만, 어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몸집은 작고, 꼬리는 둥글고 뭉툭한 편이다.
갈라파고스에서 진화의 학설을 가다듬은 찰스 다윈이 좋아할 만한 이 살쾡이는 이리오모테에만 100여 마리가 산다. 이마저도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워낙 예민하고 은둔 기질이 강해 사람 눈에 띄는 일은 거의 없다. 오키나와에 수학여행을 왔다 마야를 만나 친구가 된 사카키는 복권 당첨의 운을 타고난 셈이다.
이리오모테 야생동물보호센터에 가면 이 고양이를 실물로 볼 수 있다. 로드킬에 희생된 녀석을 박제해서 유리 안에 전시해두었다. 미니버스가 시속 40킬로미터를 지키며 천천히 달리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오하라항에 내려 나카마강 크루즈 투어를 떠난다. 날은 흐리고 바람은 차다. 보트에 오르자 야마하 모터 두 기가 꽁무니로 물길을 낸다.
뱃머리가 바다에서 강으로 진입한다. 맹그로브 나무가 마중을 나와 있다. 물빛이 탁해 깊이를 알 수는 없다.
배는 우측통행이 기본인 모양이다. 옆구리에 ‘어드벤처 아일랜드 이리오모테[ADVENTURE ISLAND IRIOMOTE]’란 글자를 단 보트가 왼편으로 지나간다. 나지막한 산들이 희부연 등성이를 드러내며 파노라마로 이어질 뿐, 악어가 사는 열대우림으로 들어가는 모험의 느낌은 없다.
모험이라면 북쪽의 우라우치강에서 시작하는 카약 투어 쪽이 더 어울린다. 두 손으로 노를 저어 강을 거스르고, 두 발로 걸어 피나이사라[ピナイサーラ] 폭포를 오른다. 피나이사라는 이곳 말로 ‘노인의 흰 수염’이란 뜻이다. 높이 55미터로, 오키나와 현에서 가장 큰 폭포다.
그러니까 이곳은 내 몸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 에코투어가 잘 정착된 섬이다. 연료는 전문 가이드가 뚝딱 만들어낸 오키나와 소바 한 그릇이면 족하다.
보트가 속도를 줄이더니 강의 지류로 방향을 튼다. 바람을 막으려고 내린 반투명 창을 말아 올리자 시계가 맑아진다. 맹그로브 나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문어 다리처럼 갈라진 뿌리의 윗동이 물에 잠겨 있다. 이물의 난간을 잡고 서서 흙탕물을 내려다본다. 무릎이 잠길 정도로 수심이 얕다.
맹그로브는 조간대[潮間帶] 식물이다. 만조의 차오름과 간조의 물 빠짐을 기억해 딱 그만큼의 높이로 뿌리가 자란다. 문어 다리처럼 갈라져 펄에 박힌 저 뿌리는 수만 년 동안 수심의 변화로 달의 인력을 재어온 셈이다.
맹그로브는 태생식물이다. 땅에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트는 여느 식물과는 번식 방법이 다르다. 열매가 가지에 달린 채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그러다 아래로 툭 떨어진다. 어떤 녀석은 50센티미터 남짓 자란 묘목의 형태로 모체에서 분리된다.
낙하의 운을 스스로 정하는지, 운에 맡기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바로 떨어져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기도 하고, 물에 둥둥 떠다니다 하구에 닿아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섬의 동쪽 해안을 차로 달리다보면 강의 하구에 펼쳐진 개펄에 외따로 떨어져 자라는 맹그로브 무더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면도날이 빗겨간 턱수염 같다.
신기한 건 이뿐만이 아니다. 맹그로브는 뿌리 끝에 있는 구멍으로 호흡할 수 있다. 또 뿌리 세포의 삼투압을 높여 물만 흡수하고 염분은 밖으로 내보낸다. 바다와 강의 경계에서 오랜 적응을 거쳐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보트가 다시 출발한다. 맹그로브 위로 웃자란 야생의 야자수가 미끈한 줄기를 뽐내며 등 뒤로 멀어진다. 상류가 가까워지자 제법 높은 산들이 앞을 막아선다. 이리오모테 살쾡이의 거처는 모터 소리가 닿지 않는 산 너머일 것이다.
잔교의 선착장이 보인다. 사람을 가득 태우고 떠나는 보트와 이제 막 도착해서 사람을 부리는 보트가 눈앞에서 엇갈린다. 잔교에 내려 나무 널을 밟고 숲으로 향한다. 지척에 수령 400년의 사키시마스오 나무가 있다.
나무의 기운이 범상치 않다. 구부러진 판 모양의 뿌리가 물뱀이 헤엄치듯 땅 위로 구불구불 뻗어 있다. 가장 높이 솟은 뿌리는 그 높이가 3미터를 훌쩍 넘는다. 옛 사람들은 이 뿌리를 잘라 배의 키로 썼다.
숲은 울창하다. 해질녘에 혼자 찾았더라면,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그림자나 짐승의 기척에 놀라 뒷목이 서늘했을 것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에겐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런 가정은 이리오모테 살쾡이에게도 해당된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앞세우고 제한속도를 넘어 쌩쌩 달리는 자동차나, 두 기의 모터를 달고 나카마강을 거슬러 오르는 보트가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야마네코는 잡식성이다. 해변을 찾아 야자게를 잡아먹기도 한다. 도로 밑에 야생동물을 위한 이동 통로를 매설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쩌다 그 길을 지나 민가로 내려온 호기심 많은 야마네코와 마주친 사람은 행운아가 아니다. 야마네코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
어떤 경우든 야성을 들켜서는 안 된다.
인간으로부터 멀어질 것.
멸종의 위기에 처한 동물이라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