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가키섬_ 카비라만
79번 도로를 타고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달린다. 207번 도로로 갈아타고 조금만 더 가면 카비라만에 닿는다. 조수와 간만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물색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주차장에 내려서자 류큐진주주식회사의 흰 건물이 보인다. 카비라만에서 흑진주를 양식하는 회사다. 일본에서는 유일하다. 유일에 목매지 않을 때 여행은 풍요로워진다.
언덕으로 난 산책길을 걸어 오른다. 나무가 길을 열어 탁 트인 전망을 보여준다. 고지마[小島]를 비롯해, 드문드문 박힌 작은 섬들 사이로 북중국해의 바닷물이 드나들고 있다. 정오가 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대낮의 쨍한 해를 피한 덕에 물빛은 푸르고 파랗게 살아 있다.
카비라만은 물살이 세서 수영을 할 수 없다. 이곳은 경승지[景勝地]다. 경치를 즐기는 곳이다 보니 눈의 감각에 의지하게 된다. 언덕에서 바다의 물빛을 조망하거나, 하얀 모래가 깔린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닥이 투명한 글래스 보트를 타고 그 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글래스 보텀 보트는 밑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 길쭉한 의자에 앉아 난간에 두 팔을 걸치고 있으면 큰 어항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보트가 돌아다니는 동안 세로로 입을 벌린 큰 조개나, 닭발처럼 생긴 산호 사이를 헤엄치는 작은 고기를 구경할 수 있다.
경승지는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출근도장을 찍듯 차에서 내려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는 흑진주 목걸이에 붙은 가격표에 입을 쭈뼛거리다 돌아서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파도가 우묵하게 깎아놓은 암석 밑에 쪼그려 앉아 땀을 식히거나, 수학여행을 온 참한 여중생들 틈에 끼어 손바닥에 오른 소라게를 보는 재미가 있다.
혼자 이곳에 닿은 여행자라면 고양이를 찾아볼 일이다. 다이빙 강사나 보트 운전사로 일하는 직원들이 기르는 고양이가 한두 마리는 꼭 있다. 카비라만을 두 번 찾았는데, 그때마다 쇼트헤어 종 고양이를 만났다. 한 번은 3월이었고, 한 번은 10월이었다.
10월에 만난 녀석은 누런 줄무늬가 있는 황설탕 빛깔을 하고 있었다. 눈물 자국을 보니 어미와 떨어진 지 채 한 달이 안 되어 보였다.
낚싯대를 폴 삼아 천막을 세우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펙 대신 아령에 끈을 묶어 고정한 암벽의 임시 휴식처가 녀석의 집이었다.
보트에 손님을 태우고 바다로 나갔는지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벤치 앞에 놓인 밥그릇의 사료를 먹거나 모래 위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보다는 모래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에 관심이 많았다.
3월에 본 고양이는 커피색 줄무늬가 있었다. 녀석은 차량 진입을 막으려고 세워둔 콘크리트 기둥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시사처럼 앞발로 버티고 서서 이방인을 슥 훑어보는 자태가 늠름했다. 그렇게 눈길을 주고 풀쩍 뛰어내리더니 아당나무 그늘로 사라졌다.
녀석을 다시 본 건 한참 뒤였다. 선글라스를 쓴, 턱살이 보기 좋게 처진 통통한 주인의 점퍼 안에서 고양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주인의 두툼한 손에 앞발을 잡힌 채 체면을 구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정작 내 관심을 끈 이는 옆 사람이었다. 야구모자를 쓴, 후드점퍼 차림의 친구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짙은 눈썹, 구레나룻까지 이어지는 턱수염, 두툼한 손과 발, 둥그스름한 어깨…. 전형적인 오키나와 남자의 인상.
재미난 것은 이 친구가 카메라 셔터에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찰칵 소리가 무슨 신호라도 되는 양 눈을 감았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 저절로 그리 되는 모양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위해서다.
한평생 ‘결정적인 순간’을 찾아다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한 말이다. 그는 35밀리 렌즈를 단 라이카로 사진을 찍었다. 파인더를 보며 피사체에 집중하다보면 저절로 한쪽 눈이 감긴다.
하지만 디카나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요즘에는 그럴 일이 없어졌다. 액정을 보며 한쪽 눈을 감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사진에 찍힐 때마다 두 눈을 감는 이유는 뭘까?
차만 타면 멀미를 해서 한평생 마을 어귀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시골의 이모할머니가 꼭 그랬다. 눈은 침침해도 귀는 밝아 셔터 소리를 용케 알아듣고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지듯 깨달음이 찾아든다.
사진을 찍힐 때 두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수줍은 본능이 아닐까?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을 키우지 않는 사람, 안팎에 경계가 없어 눈빛으로 마음을 금방 들키고 마는 이는 표정에 꾸밈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에 유독 예민한 게 아닐까?
경승지는 어쩌다 이곳을 찾은 외지인에게나 어울리는 말일 뿐, 카비라만을 날마다 드나들며 그 풍경에 젖어버린 우치난추 청년은 애써 바라볼 것이 없다. 그저 넌지시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물빛처럼 투명한 마음의 창으로 속마음을 들키지 말라고, 달팽이관의 림프액을 타고 흐르는 신호가 경고음을 보낸 모양이다.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카메라 파인더를 오래 들여다보기는 어렵다. 한쪽 눈을 감아도 내 욕심이 읽히기 때문이다.